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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어떻게 기후 위기 세계에 발을 들이게 되었나

Written by 승훈


화면 밖에 사는 나영이를 화면 안에서 만났다. 물리적 거리두기가 격상됐던 작년 12월, 우리는 서로의 모니터에 달린 카메라 렌즈를 향해 인사를 건넸다. 당시 나는 어떤 글쓰기 수업을 듣고 있었는데, 거기서 쓸 글감이 필요했다. 과제는 ‘밥’이라는 키워드로 글을 쓰는 것. 나는 나영이의 이야기가 좋은 재료가 되리라 판단했다. 인터뷰를 요청했다.

나영이를 ‘글감’으로 본 이유 또한 화면 속에 있었다. 석사 논문을 준비하던 나영이의 인스타그램에 언제부턴가 ‘제로 웨이스트’라는 해시태그가 주렁주렁 매달리기 시작했다. 쓰레기를 만들지 않기 위해 반찬가게에 가서 다용도 용기를 내미는 사진과 함께, '용기 내는 삶'이라는 캡션도 쓰여있었다. 밥 한 끼를 먹으려고 용기를 건네는 삶이라니, 계기가 궁금했다. 인터뷰를 시작했다.

그가 제로 웨이스트를 실천하게 된 건 우리가 줌으로 만날 수밖에 없는 이유와 같았다. 팬데믹의 창궐. 나영이는 몰랐다고 말했다. 지금 우리가 거리를 둬야 하는 이유가 기후위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나 살자고 먹는 끼니에서 생각보다 많은 쓰레기가 나왔다, 사람 살자고 하는 일이 다른 것들의 숨통을 조였다, 생을 위한 것이 생의 터전을 해쳤다,라고 덧붙였다. 배달 음식 한 번 먹으면 소화하지 못할 쓰레기가 쌓였다. 마트에서 파는 식재료도 비닐 플라스틱에 꽁꽁 묶여 있었다. 그리하여 일말의 고민 없이 행동했다고 말했다. 그 시작이 바로 제로 웨이스트였다.

그때부터 나영이는 장바구니 속에 포장 용기를 넣어 이리저리 쏘다녔다. 용기(勇氣) 내어 찾아간 횟집에서 용기(容器)를 내밀었다. 그러나 이미 포장된 물회가 나영이를 반겼다. 결국 육수와 소면만 반찬통에 담아왔지만 이 또한 절반의 성공이라 여기며 더더욱 용기 냈다. 포장되지 않은 애호박 하나를 찾기 위해 근처 재래시장을 뒤적였다. 배달음식도 끊었다. 대신 논문 쓸 시간을 쪼개어 요리를 했다. 그저 오늘은 뭘 먹을까 정도 따위의 고민을 하는 나와 달리, 나영이에겐 매끼가 고난의 연속처럼 보였다. 그러나 나영이는 자신이 옳은 방향으로 걷고 있다는 확신이 있었으므로, 그것들이 고통스럽지 않다고 말했다. 나는 감탄과 동시에 '재밌는 글감'을 어떻게 풀어나갈지에 대해 고민했다. 인터뷰를 끝냈다.

그런 이야기를 듣고서도 나는 여전히 기후 위기를 위기로 느끼지 못했다. 그저 무사히 과제를 마무리할 수 있어 기쁠 따름이었다. 그런데 무언가 거슬리기 시작했다. 늘 그 자리에 놓여있던 것들이 조금 다르게 보였다. 그날 이후로 현관을 나설 때나, 밖에서 식사를 할 때, 배달음식을 먹을 때 마주하는 그것들을 볼 때마다 나영이가 생각났다. 어디를 향하는지 알 수 없는 미안함과 죄의식 같은 것이 피어올랐다. 나는 나영이의 노력을 글쓰기 재료로만 사용했다. 그의 이야기를 일회용품처럼 쓰고 있었다. 누군가의 치열한 고민과 실천을 나는 보란 듯 짓밟고 있었다. 그건 분명 내가 지향하는 모습과 거리가 먼 일이었다. 부끄러웠다.

나는 그런 사람이 되고 싶었다. 세상에 해를 덜 끼치는 사람. 그것은 누군가 차곡차곡 쌓은 모래성을 짓밟지 않는 일 같은 것이었다. 누군가의 실천을 무의미하게 느끼지 않도록 만드는 것, 나는 그것이 '수많은 나영이'에게 생채기 내지 않는 방법이라 생각했다. 그러려면 당장 교량을 짓고 자연과 나 사이의 거리를 좁힐 필요가 있었다. 거리두기가 격상됐던 12월, 나는 그간 단절됐던 자연과의 관계를 회복해야겠다고 다짐했다. 그동안 외면하던 문제를 바라보는 것을 실천의 출발로 삼았다. 연대라는 단어로 세탁할 마음은 추호도 없다. 하고 싶은 걸 할 뿐이다. 기후 위기라는 세계에 발을 들이게 된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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