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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새미 Jan 04. 2019

이 남자의 유통기한은 무제한

#4. 가로수길

일요일 점심에는 유니언니와 가로수길에서 점심 약속이 있었다. 언니와 나는 주말에 항상 만나 점심을 먹으며 와인을 마셨다. 그리고 저녁이 되면 와인이나 사케를 마시며 한 주 동안 쌓였던 회사 욕을 했다.

이렇게 매주 주말을 마무리했다. 이것이 내가 유일하게 업무 스트레스를 푸는 한 가지 방법이었다. 이 날도언니와 점심을 먹으며 금요일 밤에 있었던 일들을 이야기했고 오늘 저녁에 그 남자와 같이 영화를 보기로 했다고 말했다.
언니는 오늘 저녁을 함께 하지 못 하는 것을 아쉬워하며 그 사람이 너에게 관심이 있는 것 아니냐고 물었다.

나는 "그건 아닌 것 같아."라고 대답했다.

왜냐하면 내가 먼저 영화를 보자고 했기 때문이었다. 언니와 이야기를 나눈지 얼마 된 것 같지 않은데 벌써 저녁 6시가 다 되었다. 그에게서 전화가 온다. 언니와 가로수길 카페에 앉아 커피를 마시고 있으니 여기로 오라고 했다.

오라 가라 귀찮을 법도 한데, 순순히 내가 있는 곳으로 찾아 왔다. 그는 내가 일행과 함께 있을 거라 생각을 못 했는지, 마저 이야기를 나누라며 커피 한잔을 시켜 창가 자리에 앉아 있었다. 앉아 있는 그의 뒷모습이 보인다.

'아, 옷 입는 거 진짜 내 스타일 아니다. 운동선수도 아니고 저게 뭐야.'

그도 그럴 것이 농구복 스타일의 반바지와 조던 운동화, 그 위엔 후드티셔츠를 입고 왔기 때문이다. 가로수길에 온다고 나름 꾸며 입고 온 내 모습과 너무나 상반된 편안하게 입고 온 그의 모습에 짜증이났다.


언니도 이내 다른 약속이 있다며 자리를 떴고 나는 그와 마주 앉았다.

"영화 뭐 예매했어요?"

"한국 영화."

"아...나 한국 영화 진짜 싫어하는데. 저 문화 사대주의자에요."

내가 퉁명스럽게 말했다.

"그럼 다른 영화로 바꿀까?"

"아녀. 그냥 봐요."

"저녁은 뭐 먹을까?"

"저 냉면 좋아해요."

그는 신사동에 맛있는 냉면집이있다며 가자고 했다. 그런데 차를 한강공원에 주차해 놓았단다. 하는 수 없이, 어색하게 둘이 한강 공원으로 걸어갔다. 차를 왜 이 곳에 세워두었냐고 물었더니 여기서 농구하다가 왔다고 그가 말했다. 

'아... 농구하고 와서 옷차림이 이랬구나.'

그의 운동복이 이해가 되었다. 차를 타고 그가 안내한 냉면집으로 갔다. 물냉면에 만두까지 시켰다. 냉면을 한 입 먹었는데 너무 맛있었다.

"우와, 여기 진짜 맛있네요!" 극찬을 하니 여기 원래부터 맛집이라며 어깨를 으쓱했다. 그와 나는 냉면을 먹고 청담 CGV로 자리를 옮겼다. 그는 계속 "네가 한국 영화를 안 좋아해서 어떻게 하지, 영화 다른 것으로 바꿀까?"라며 여러번 내 의사를 물어본다. 나는 그냥 재미있게 볼 테니 이제 그만 이야기하라고 말했다. 영화를 보는 내내 그는 내 눈치를 보는 것 같았다. 싸우고 도망가고 욕하는 진부한 영화를 다보고 나니 저녁 8시가 넘었다.

그는 영화관에서 우리 집까지 그리 멀지 않으니 데려다 주겠다고 했다. 늦은 저녁 시간이라 그런지 차도 막히고 갑자기 비도 오기 시작한다.


그는 차 안에서 계속 사내연애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묻는다. "둘이 좋으면 좋은 거지, 제가 어떻게 생각하고 말고가 있나요?" 라고 대답하니 그럼 네가 사내연애를 하는 것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묻는다.

'뭐야, 이 사람. 나랑 영화 한 편 보고 지금 사내연애까지 생각하는 거야?' 

그렇지만 왠지 모르게 그의 기대를 무너뜨리고 싶지 않았다. 사내연애 할 사람이 있으면 할 수 있다고 말했다.

그 순간 우리 눈앞에서 천둥과 번개가 무섭게 친다.




매주 일요일에는 지인 농구팀과 항상 한강 공원에 모여 운동을 했다. 내가 유일하게 푸는 스트레스 방법 중 하나였고 특별히 약속이 없는 날에는 집 앞의 한강 공원을 달렸다. 농구를 마치고 다 같이 밥을 먹으러 가자고 했지만 오늘은 약속이 있다고 하며 나 홀로 빠져나왔다. 시간이 애매하게 남아 가로수길 카페에서 커피를 마셨다.

그녀에게 전화를 하니 가로수길 00카페로 오라고 한다. 그녀에게 가는 길, 약간의 긴장감이 생긴다. 처음 가보는 카페였는데 생각보다 쉽게 찾아갔다.

그녀는 일행과 같이 있었다. 내가 생각했던 그림이 아니었다. 그 둘은 심각한 이야기를 하는 것 같아 나는 커피 한잔을 마시고 있을 테니 둘이 이야기를 더 나누라하며 자리를 피했다.

커피를 지금 두 잔째 연달아 마신다. 조금 이따 그녀가 내 등을 '툭툭'친다.

"커피 다 마셨어요?"

내 커피 잔에 반 이상 남은 양을 보더니 또 묻는다.

"영화 뭐 예매했어요?"

"한국 영화."

그녀가 인상을 쓴다. 한국 영화를 안 보는 사대주의자란다. 그럼 다른 영화를 보자고 했더니 그건 또 귀찮으니 싫단다. 그냥 보자고 한다. 그녀가 영화를 보자고 했는데 싫어하는 영화를 예매한 것은 아닌가 싶어 그것만 자꾸생각하게 된다. 배고프다고 하길래 "뭐 먹을까?" 라고 물으니 냉면을 먹자고 한다. 내가 좋아하는 냉면집이 있어 그곳으로 안내했다. 그녀는 주차장 가는 길에 면 종류를 좋아한다는 이야기를 한다. 그리고선 칼국수는 대전에 있는 얼큰이 칼국수가 맛있고 콩국수는 대치동이 맛있다는 이야기를 한다. 재잘재잘 말하는 것이 꼭 앵무새 같다.

내 차를 타고 냉면집으로 갔다. 그녀는 물냉면과 만두를 시켰다. 냉면을 한 입 먹더니 이렇게 맛있는 곳을 어떻게 알았냐며 방긋 웃는다. 내가 좋아하는 냉면집이라고 말했다. 그녀는 냉면을 먹느라 시켜놓은 만두는 한 개밖에 먹질 않는다. 

곧 영화 시간이 가까워져 다시 이동을 했다. 영화관을 가는 내내 계속 생각을 했다.

'한국 영화 안 좋아한다는데 취소해야할까?'

한 번 더 그녀에게 물어보니 영화 볼테니까 그만 물어보라고 입을 막는다. 결국 영화관에 들어가 그녀가 끔직이도 싫어한다는 '한국 영화'를 보았다. 영화가 시작되고 나서부터 그녀는 깜짝 깜짝 놀라며 안 좋아한다던 한국 영화를 숨죽이고 본다.

내 생각에는 재미있게 본 것 같은데 영화를 다 보고 나오면서 "아, 영화 진짜 재미없어." 라고 말한다. 센 척하는 것 같은 그 모습이 조금 웃기고 귀여워 보였다.

집에 데려다 주겠다고 했다. 무언가 말을 하고 싶은데 그냥 머릿속으로만 빙빙 맴돈다.

"사내 연애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해?" 라고 물었다.

'아차, 내가 무슨 말을 하는거야!'

라고 생각할 찰나, 그녀는 긍정적으로 대답해 주었다. 그래서 이왕 실수한 거 한 번 더 물어보았다.

"네가 사내 연애하는 것도?"

그것도 그녀는 아주 긍정적으로 대답을 한다. 우리가 탄 차 앞 유리로 천둥과 번개가 '우르르 쾅쾅-' 무섭게 친다.

그 순간 내 마음에도 스파크가 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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