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장 내 삶의 뿌리, 흙이 되어준 사람들
제1부 나를 만든 시간, 흙이 되어준 사람들
제1장: 내 삶의 뿌리, 흙이 되어준 사람들
한 그루의 나무가 어떤 모습으로 자랄지는 그 뿌리가 뻗은 땅의 깊이와 자양분에 달려있다고 믿는다. 내 삶의 길을 돌아볼 때, 내 생각과 행동, 그리고 내가 꾸는 꿈의 가장 깊은 곳에는 언제나 나를 만들어준 사람들이 있었다. 한 분은 내 안에 결코 무너지지 않을 내면의 기둥을 세워주셨고, 다른 한 분은 거친 세상의 파도를 어떻게 헤쳐나가야 하는지 온몸으로 보여주셨다. 또 다른 이들은 기꺼이 자신을 낮춰, 내가 쉴 수 있는 너른 그늘이 되어주었다. 나의 모든 이야기는 바로 그 따뜻한 땅과도 같았던 이들에게서 시작된다.
내 유년의 기억 속에는 두 분의 스승이 계신다. 한 분은 아버지, 다른 한 분은 국민학교 4학년 때 담임 선생님이셨다. 여름날 마을을 덮친 큰 홍수로 개울이 범람했을 때, 아버지는 허리에 굵은 밧줄을 묶고 성난 물살 속으로 뛰어드셨다. 이웃을 구해내던 그 거친 숨소리와 단단한 등은 어린 내게 공동체와 책임감의 의미를 그 어떤 말보다 깊이 가르쳐주었다. 평생을 소작인으로 밭을 갈며 묵묵히 가족을 부양하셨던 아버지의 땀방울은 그렇게 내 안에 ‘책임’이라는 씨앗을 심어주었다.
담임 선생님께서는 내게 또 다른 세상을 열어주신 분이다. 주판을 가르쳐 주시며 “너는 커서 은행장이 되라”고 격려하셨고, 삐뚤빼뚤한 내 글씨를 바로잡아 주시던 다정한 손길을 기억한다. 밴드부를 만들어 작은 북을 치게 해주셨던 그 기억은 지금도 내 가슴을 뛰게 한다. 무엇보다 ‘신독(愼獨)’, 즉 홀로 있을 때에도 도리에 어긋남이 없도록 몸가짐을 바로 해야 한다는 가르침은 훗날 수많은 선택의 기로에서 나를 붙잡아준 인생의 기둥이 되었다.
내 서울 유학길은 보이지 않는 가족들의 헌신 위에 놓여 있었다. 중학교 3학년, 나는 서울로 전학했다. 그것은 넉넉지 않은 살림에도 아들 하나만큼은 더 넓은 세상에서 공부시키겠다는 부모님의 힘겨운 결단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서울 유학 가려면 논 팔고 소 팔아야 하는데, 너희 집이 그렇게 부자냐?”던 당시 선생님의 걱정 섞인 물음은 뼈아픈 현실이기도 했다. 하지만 가족들은 논을 파는 쉬운 길 대신, 온 식구가 허리띠를 졸라매며 나를 지원하는 쪽을 택했다.
가족들이 땀 흘려 만들어준 그 길에 대한 고마움과 미안함은, 어린 내 가슴에 평생 갚아야 할 무거운 마음의 빚이자 책임감으로 남았다.
1. 부끄러움이 많은 아이
나는 어려서부터 유난히 부끄러움이 많은 아이였다. 낯선 사람 앞에서는 물론, 익숙한 얼굴들 앞에서도 나는 늘 세상 뒤편으로 한 걸음 물러섰다. 사람들 앞에 서면 온몸의 피가 얼굴로 쏠리는 뜨거운 감각과 함께 목소리는 저 깊은 곳으로 가라앉아 버렸다. 나를 세상과 분리하는 듯한 투명한 벽, 그것이 내가 기억하는 어린 시절의 막막함이었다.
국민학교 4학년 아버지 생신날, 그 부끄러움은 내게 지울 수 없는 흔적을 남겼다. 우리 집은 가난했지만 아버지는 스승에 대한 존경심이 유별나 해마다 당신의 생신이면 선생님들을 집으로 초대해 조촐한 잔치를 여셨다. 그날이면 어머니와 동네 아주머니들은 이른 아침부터 미역꾹을 끓이고 잡채를 버무리시며 온 집안을 고소한 냄새로 채웠다. 아버지는 그 중요한 초대의 임무를 처음으로 내게 맡기셨다. 아버지의 눈빛은 깊은 믿음을 담고 있었지만, 나는 며칠을 망설였다. 선생님의 얼굴을 마주할 용기도, 가난한 우리 집 살림을 보이는 것도 어린 마음에 사무치게 부끄러웠던 탓이다. 결국 나는 입을 떼지 못한 채 날들을 흘려보냈다. 생신 당일, 저녁상이 다 차려지고 방 안에는 김이 모락모락 피어올랐지만, 선생님들은 오시지 않았다. 나의 침묵이 만들어낸 텅 빈 자리가 나를 송곳처럼 찔렀다. 어쩌다 지나가던 친척 덕분에 뒤늦게 소식이 전해져 선생님들이 오셨고, 잔치는 무사히 끝났다. 나는 방구석에 웅크린 채 아버지의 불호령이 떨어지기만을 기다렸다. 그러나 아버지는 아무것도 묻지 않으셨다. 어머니 또한 그저 내 밥그릇 위에 반찬을 얹어주실 뿐이었다. 꾸짖음보다 더 무겁게 다가온 그 침묵 속에는, 아직 여물지 않은 아들의 서툰 마음을 헤아리는 깊은 포용과 기다림이 담겨 있었다. 어른들의 그 위대한 사랑은, 부끄러움 많은 아이가 세상 앞에서 완전히 무너지지 않도록 지켜주는 단단한 울타리였다.
훗날 내가 치유농장을 구상할 때, 이 기억은 가장 근본적인 원칙이 되었다. 진정한 치유의 공간이란 성과를 재촉하거나 실수를 꾸짖는 곳이 아니라, 흙이 서툰 씨앗을 말없이 품어주듯 각자의 속도를 묵묵히 기다려주는 곳이어야 한다는 믿음. 나의 농장은 바로 그 기다림의 철학 위에 세워졌다.
2. 수줍지만 개구장이었던 아이
수줍음 많던 내 안에는 주체할 수 없는 개구쟁이의 피도 흘렀다. 신발이 닳을세라 손에 들고 맨발로 걷던 2킬로미터의 등하굣길은 나의 무대였다. 흙냄새와 풀냄새가 뒤섞인 그 길 위에서 나는 자유로웠다. 여름이면 뜨거운 햇살 아래 냇가에서 소나기를 맞으며 멱을 감았고, 밭두렁을 넘어 수박을 서리해 발로 툭툭 차 쪼개 먹었다. 그 달고 시원한 맛은 세상에서 가장 완벽한 자유의 맛이었다. 내성적인 모습과 활달한 장난기가 뒤섞인, 나 자신도 종잡을 수 없는 아이였다.
그러던 어느 눈부신 봄날, 친구들과 큰 나무 꼭대기에 올라 세상을 내려다보며 장난을 치다 동네 어른의 호통에 놀라 허둥지둥 내려오게 되었다. 바로 그 순간이었다. 발을 헛디딘 나는 짧은 비명과 함께 땅으로 떨어졌고, 다리가 부러지는 큰 부상을 입었다. 나무 위에서의 짧은 유희는 내 어린 시절을 크게 흔든 전환점이 되었다. 그해 여름방학, 나는 꼬박 두 달을 하얀 기부스를 한 채 가평 읍내 외할머니 댁에서 보내야 했다. 친구들이 냇가에서 물장구를 치고 산으로 뛰어다닐 시간, 나는 방 안에 갇혀 꼼짝할 수 없었다. 그때는 미처 몰랐다. 개구쟁이 시절의 이 사고와 병원 생활 기록이 훗날 내 삶의 가장 큰 인연을 잇는 뜻밖의 다리가 되어줄 줄은.
세월이 흘러, 나는 친구의 소개로 한 여자를 만나 사랑에 빠졌다. 운명의 장난처럼, 교대를 졸업한 그녀의 첫 부임지는 바로 내가 졸업한 상천국민학교였다. 우리가 한창 연애 중이던 어느 날, 부임 첫날 학교 서류를 정리하던 그녀는 낡은 생활기록부 뭉치 속에서 익숙한 내 이름을 발견했다. 그리고 그 기록 속에서 ‘나무에서 떨어져 다리가 부러짐’이라는 문장과 마주했다. 그녀는 기록 속에 잠들어 있던, 수줍지만 천방지축이었을 어린 날의 나를 만난 것이다. 훗날 아내는 그때의 감정을 ‘내 어린 시절의 상처까지 미리 본 것 같아 마음이 짠했다’고 회상했다. 그렇게 내 아픔의 기록 위로 우리의 사랑 이야기가 운명처럼 겹쳐졌다.
그렇게 내 삶의 상처는 훗날 사랑으로 이어졌지만, 그 상처가 처음으로 따뜻한 보살핌을 받은 곳은 외할머니의 품이었다. 답답함과 서러움에 밤마다 남몰래 눈물을 훔치던 내게, 외할머니는 상처를 보듬는 사랑의 모양을 가르쳐 주셨다. 매일같이 정성껏 죽을 끓여주시며 퉁퉁 부은 내 다리를 조심스레 어루만져 주셨다. 더운 여름밤이면 땀을 뻘뻘 흘리시면서도 밤새 부채질을 해주셨다. 그 따뜻하고 거친 손길은 단순히 뼈가 붙는 것을 도운 것이 아니었다. 어쩌면 다신 제대로 걷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어린 마음의 두려움과 불안을 스르르 녹여주었다. 세상은 여전히 기댈 수 있는 안전하고 따뜻한 곳이라는 믿음의 회복이었다.
그때 외할머니 댁에서 읽은 『돌아온 래시』는 나의 감수성을 깊게 흔들었다. 가난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팔려 간 개 ‘래시’가 수많은 시련을 견디고 마침내 주인의 품으로 돌아오는 이야기. 나는 그 충직한 믿음에 가슴이 저릿했다. ‘사람도 결국 자신이 있어야 할 곳으로 돌아가야 한다.’ 그때는 막연했던 그 문장이, 시간이 흐를수록 내 삶을 관통하는 질문이 되었다. 나는 어디로 돌아가야 하는가? 나의 뿌리는 어디인가? 훗날 도시의 삶에 휘말리고 방황할 때마다, 래시는 내 마음속 이정표가 되어주었다. 돌고 돌아 결국 흙과 사람 곁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말해주었다.
외할머니의 손길이 세상에 대한 믿음을 회복시켜 주었듯, 치유농업 또한 따뜻한 돌봄으로 상처 입은 이들의 마음을 어루만지는 곳이어야 했다. 땅은 서툰 손길을 꾸짖지 않고, 묵묵히 품어주고 기다려 때가 되면 생명의 힘을 기어이 내어준다. 나는 그날의 부모님처럼, 외할머니처럼, 그리고 저 너른 흙처럼, 누군가의 서툼과 불완전함을 있는 그대로 끌어안고 기다려주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나의 농장은 바로 그런 기억과 다짐 위에 세워진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