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기와 함께 했던 이야기는 브런치 스토리에 자세히 담았습니다. 반려동물과 함께하고 있는 분들, 또는 저와 같이 떠나보냈던 경험이 있는 분들에게 큰 위로가 되길 바랍니다.)
딸기는 내가 초등학교를 막 들어갈 때쯤, 아니 초등학교 1학년 때였나, 어쨌든 너무 어려서 정확히 언제였는지 기억나지 않는 날 우리 집에 왔다.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은, 작고 작은 아이였다. 나도 스스로 밥을 챙겨 먹지 못하는 나이였음에도 딸기에겐 제때 사료 30알을 세어 물에 불려주었다. 그렇게 우리 가족은 4명에서 5명이 되었다.
그 소중한 아이가 우리 곁을 떠날 수도 있다는 걸 알았을 땐 내가 대학이라는 목표를 향해 앞만 보고 달리던 시절이었다. 학교에 살다시피 하며 집에서는 잠만 자길 몇 년. 내가 내 인생에 내 시간을 다 바칠 동안, 우리 강아지는 서서히 나이 들어갔다. 심지어 대학을 입학해서는 더 바쁘게 지냈던 탓에 어느 순간부터 나도 모르게 그 아이가 당연히 계속 옆에 있어줄 거라 생각하게 되었다. 실제로 그 작은 몸으로 그때까지 버텨주기도 했고.
지금까지도 아쉬운 건, 딸기는 우리에게 핸드폰이 없던 시절, 있어봤자 겨우 가정에 한두 명씩 가지게 됐던 시절에 태어났다. 그래서 어릴 적 사진이나 영상들이 많이 없다. 몸집이 크기 전 새끼 때 사진이라곤 내가 들꽃이 흐드러지게 핀 꽃밭에서 딸기를 안고 활짝 웃는 사진만 있다. 지금의 우리에게 왔다면 첫 강아지였기에 몰랐던 것들을 다 해줬을 텐데. 모든 걸 다 기록하고 남겨놨을 텐데. 계속 함께하며 온기를 더욱 충분히 느끼려 했을 텐데.
딸기는 자라오면서 몇 번의 수술을 했다. 약도 계속 챙겨 먹여야 했고, 어느 순간부터는 소변을 가리지 못해 패드를 집안 곳곳에 깔아 두고 생활했다. 그 모습이 안쓰럽다가도 그런 상태였음에도 오래 우리 곁에 있어줘서 참 고마웠다. 나이가 더 들면서 기운이 없어져 잠이 많아지긴 했지만 가끔 장난감을 갖고 노는 모습을 보면 청춘이 따로 없었다. 그때 행복하게 짓던 소리가 아직도 생생하다. 빨간색 뼈다귀 장난감을 참 좋아했었는데. 더 많이 던져주고 더 많이 놀아줄걸. 그게 너의 유골함 옆에 놓이기 전까지 실컷 말이야.
그러다 내가 대학을 졸업하고 취업을 해서 첫 출근을 앞둔 2022년 3월 말, 딸기는 몸을 가누지 못할 정도로 쇠약해져 갔다. 똑바로 걷지 못해 한쪽으로 쓰러질 것처럼 위태롭게 집 안을 돌아다녔고, 그러다 문 뒤로 숨거나 갑자기 멈춰 생각에 잠긴 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때부터 우리 가족은 제정신이 아니었다.
병원을 데려갔더니 여기저기 성한 곳이 없다고 했다. 나이도 많이 먹어서 해줄 수 있는 게 많이 없었다. 그래도 최대한 검사할 수 있는 것들을 하고 치료받을 수 있는 걸 받고 돌아온 딸기는 며칠은 더 살 수 있을 것처럼 상태가 회복되어 돌아왔다. 눈동자가 맑아진 게 느껴졌고, 나는 그 생기를 믿었다. 그러나 의사는 금방이라도 잘못될 수 있는 상태이기 때문에 입원해서 치료하기보다 집에서 약을 먹여보라고 권했고, 통원 치료를 하자고 했다. 가져온 약은 노견에게 먹이면 언제 쇼크사가 올지 모르는 독한 약이었지만 우리에겐 놓을 수 없는 유일한 희망이었기에 어쩔 수 없이 먹였다. 그렇게 이틀정도를 위태롭게 보냈다.
그러다 내가 첫 출근을 하고 딸기도 통원치료를 하기로 했던 날 새벽. 이미 18년이라는 세월을 견딘 몸으로 그 약까지 견딜 힘이 남아있지 않았는지, 딸기는 그렇게 우리 곁을 떠났다. 이틀 내내 벽을 넘어 내 방까지 끙끙 거리는 소리가 들렸을 정도로 잠을 설쳤던 딸기가 그날따라 조용하길래 다행히 오늘은 잘 자나보다 했던 밤이었다. 사실 그렇겠지 하고 현실을 외면했던 부분도 있었다. 딸기가 아프기 시작했을 때부터 나는 하루가 멀다 하고 울었고, 그래서 많이 힘든 상태였다. 우리 가족 모두 마찬가지였다. 그러다 모처럼 모두가 푹 잠들었던 날 새벽에 눈도 다 못 감은 채로 떠났다.
내가 맞춰놓은 알람 소리도 듣기 전이었다. 방문을 열고 내 이름을 부르던 엄마의 떨리는 목소리에 침대를 뛰쳐 내려오며 딸기에게 달려갔지만 이미 사랑하는 나의 강아지는 차게 굳어가고 있었다. 어제 자기 전까지만 해도 따뜻하게 숨 쉬던 생명이었는데 불과 몇 시간 만에 우리 곁에 없는 존재가 되었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상실감이었고, 처음 느껴보는 어마어마한 슬픔이었다. 심장이 쿵 내려앉아 땅 끝까지 내려갔고, 눈에선 폭포 같은 눈물이 흘렀다. 그렇게 딸기를 크게 불러본 적이 있었나 싶을 정도로 그 이름을 크게 외쳐가며 통곡했다. 금방이라도 숨이 돌아와 떠난 게 아니었다고 말하며 나와 눈을 맞춰줄 것만 같았다. 믿고 싶지 않았다.
그 와중에 야속하게도 출근 시간은 다가오고 있었고, 나는 무슨 정신이었는지 우는 걸 멈추고 미리 알아봤던 반려동물 장례식장 번호를 아빠에게 전달했다. 그리고 역시 미리 골라뒀던 잘 나온 사진들을 가족들에게 보여주며 영정사진을 골랐다. 사실 나는 딸기가 아프기 시작했을 때부터 예감하고 있었다. 진짜 그 아이가 세상을 떠났을 땐 내게 그런 걸 알아보고 찾아볼 정신이 없을 거라고. 나도 모르게 떠나보낼 준비를 하고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럴 시간에 한번 더 쓰다듬어줄걸. 무서움에 본능적으로 했던 행동들이었던 것 같다.
그렇게 너무나도 안고 있고 싶던 딸기를 뒤로 하고 초점 없는 눈으로 출근길에 나섰다.
집 밖으로 나서서 회사 건물 밖을 나올 때까지 나는 한 방울의 눈물도 흘리지 않았다. 그 현실을 믿고 싶지 않아서 잠시 외면한 채 업무 인수인계를 받으며 정신없이 하루를 보냈다. 그러다, 퇴근을 하고 건물 밖을 나서자마자 속부터 끓어 넘쳐버렸다. 그것까진 참을 수가 없어 같이 퇴근하는 사수님께 고백했다. 사실 오늘 새벽 18년간 함께 했던 가족을 떠나보냈다고.
사수님과 헤어지고 그 길로 엄마 차를 타고 납골당으로 향했다. 마지막 인사가 너무 짧았던 터라 울면서 그곳에 가면서도 정말 실감 나지 않았다.... 너는 마지막 가는 모습을 내게 보여주고 싶지 않았던 걸까. 근데 나는 아침까지만 해도 내 눈앞에 있었던 네가 퇴근하고 나니 내 두 손으로 감싸질 만큼 작은 유골함에 담겨있는 모습을 보고 얼마나 서글펐는지 몰라. 가기 전에 한 번 더 안아볼걸, 거기 담기기 전에 내 온기를 최대한 전하고 보내줄걸 엄청 후회했어.
그렇게 딸기를 보내고 돌아온 집은 너무 텅 비어있었다. 하나의 온기가 빠져나가버린 집은 내가 알던 집이 아니었다. 곳곳에 있는 딸기의 흔적에 몇 달 동안 힘들었다. 늘 집에 오면 당연히 있었는데, 차로 40분을 가야 볼 수 있는 존재가 된 건 너무 슬픈 일이었다.
회사에서 인수인계를 받는 동안 우연히 시선에 닿았던 창문 밖 하늘. 무지개가 뜰 리 없는 맑은 하늘이었지만 그때쯤 그 작은 유골함에 담겼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한 가지 소원을 위로 보냈다. 우리 강아지가 건너갈 무지개다리만큼은 가장 밝고 예쁜 것으로 해달라고. 우리 가족의 사랑보다 그 아이가 남기고 간 사랑이 더 컸다고. 부족함은 되려 우리에게 있었다고.
어느덧 딸기를 보낸 지 2년이 흘렀다. 1주기가 되던 날, 딸기를 보러 가 엄청 울었었는데, 시간이 지속적으로 약을 줘서 지금은 눈물을 참고 딸기에 대한 글을 이만큼 쓸 수 있는 정도가 되었다. 못해준 것들만 생각나서 미안한 마음에 참 많이 울었었는데, 그런 내 모습을 보고 속상해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눈물이 조금씩 그쳐갔다. 많이 그립고 보고 싶지만 그 아이가 하늘에서 우리를 기다리진 않았으면 한다. 그저 아프지 않은 건강한 몸으로 마음껏 뛰어놀며 행복하게 지내고 있길. 찾는 건 먼 훗날 우리가 할 테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