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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빈아 Sep 14. 2023

왕이 갇힌 방

[인스타툰 스크립트]

2023/09/14 업로드


지금까지, 아니 앞으로도 잊지 못할 눈빛이 있다.

(텔레비전 앞에 앉아 리모컨을 누르는 빈아.)


어린 시절 우리에게 초원의 동물들은 굉장히 강하면서 웅장한 존재들이었다.

(화면 가득히 사자 한 마리가 등장한다.)


'지금쯤 큰 바위 위에 앉아 드넓은 초원을 바라보고 있겠지? 맹렬히 사냥을 하고 있으려나...'

(상상을 하는 빈아. 상상 속의 사자가 사냥을 하고 있다.)


나는 환상 속의 동물을 만나는 게 마냥 설레지만은 않을 수도 있다는 걸

(동물원의 실내 공간. 걷다가 무언가를 발견한 듯한 빈아.)


동물원에서 처음으로 마주친, 한 마리의 사자 덕분에 알게 되었다.

(생기가 없는 사자의 갈기가 표현되어 있다.)


너무나 큰 존재로 부풀어 있던 사자가 아무것도 없는, 차가운 시멘트 벽과 창살, 유리벽만 있는 그 작은 공간에 힘 없이 주저앉은 채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방에 갇혀있는 사자 한 마리.)


탁하고 슬프고 무상한 눈빛이었다.

(사자와 눈을 맞추고 있는 빈아.)


그 눈으로 바라본 세상이 너무나 덧없고 숨 막혀서 그 앞에 한참을 멈춰 서있었다.

(사자의 눈 클로즈업.)


나는 그 이후로 절동물원에 가지 않는다.

(사자의 눈꺼풀이 내려앉는다. 그 눈동자에 비친 빈아의 모습.)


 내가 가지고 있는 여러 신념들 중 앞으로도 평생 지키고 싶은 것이 있다. 동물은 현장에서 보고 싶다는 것. 여기서 말하는 현장에 동물원은 절대 포함되어 있지 않다.


 그날 마주친 사자의 눈빛이 아직도 생생하다. 그런 내 기억과 대비되는, 탁하디 탁했던 눈망울. 동물의 왕이 갇힌 방은 너무 아무것도 없었다. 살던 곳의 기온을 최대한 맞춰줬는지 몰라도, 느껴지는 기운은 극히 냉했다. 다큐멘터리 속 생기 돋던 갈기는 푸석하고 칙칙했고, 앉아있는 자태는 그 아이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툭 건드리기만 해도 무너질 듯했다.


 그 모습을 인지하고 사자와 눈마주친 순간, 그 소중한 눈을 동물원에서 바라보고 있는 스스로가 굉장히 수치스럽기도 했다. 나 같은 사람 때문에 있어야 할 곳에 있지 못하게 된 왕 앞에서 나는 한없이 하찮아졌다. 그 방처럼 정말 아무것도 아닌 존재가 되는 경험을 했다.


 그날 이후 나는 동물원에 가지 않는다. 그 눈빛을 다른 동물에게서 볼까 봐, 나로 인해 또 다른 동물들이 그 공간에 갇히게 될까 봐 가지 못한다. 지금도 지극정성으로 동물들을 돌보고 있을 사육사 분들을 존경하긴 하지만, 인간이 자초한 결과로 파생된 직업이고, 동물원의 존재의 이유를 아직까지 찾지 못한 내가 감히 생각하건대, 결국 사육사도 동물원과 같이 언젠가는 사라져야 할 것이다.


 나는 아마 그 사자의 눈빛을 평생 가져가겠지. 그 사자도 내 눈빛을 읽었다면 바라건대 너도 잊지 말아 달라고 하고 싶다. 너를 가둔 사람, 너를 키우는 사람, 너를 만나는 사람과 나 역시 다르지 않지만 너로 인해 스스로를 돌아보게 된 한 나약한 존재를 기억하고 있어 줬으면 한다.


 너는 나를 나약하다 생각해도 돼. 그날 정말 미안했어. 이런 말 할 자격은 없지만, 아직 살아있다면 잘 지내고 있길 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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