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흰둥이 Oct 18. 2023

나에게 결혼이 뭐길래

프롤로그

"언니. 결혼은 대체 뭘까?"

20살 맑았던 나이부터 오랜 친구로 지내는 그녀의 짧은 질문에 조금의 두려움과 억울함이 묻어있었다.

지금 만나는 친구와 결혼을 원하는 그녀에게 부담스럽지 않고 적당히 힘이 되는 좋은 대답을 골라내려고 뇌 곳곳을 뒤지다 보니, 문득 내 부모님의 이혼이 떠올랐다. 지난날동안 내게 결혼은 이혼과 동일한 의미였다.


나는 무한증식하는 부모과 형제자매 속에서 성장했다.

요새 이혼이 희귀한 세상은 아니다만, 우리 가족 같은 경우 매우 여러 번, 비교적 최근까지도 가족 구성원의 변화를 겪어야 했다.

내가 초등학교 2학년 때 부모님이 첫 이혼을 하셨다. 두 분의 이야기를 종합해 보자면, 어렸던 부부는 서로에게 더 낼 화가 남아있음에도, 아니 서로를 아프게 할 말들이 더 남아있다는 게 두려워서 비관적 미래에 잠식당했던 것 같다. 그 이후로도 나의 가족은 둘이었다가, 넷이었다가, 여섯이었다가.. 계속해서 바뀌었다.


나는 무슨 전쟁통처럼 정신없이 바뀌는 가족 속에서 슬쩍 흘려지지 않기 위해 나에게 주어진 '양보자' 역할을 충실히 수행했다.  당시의 자아에 영향을 끼친 것은 내 관심사나 잘하는 것이 아니라 내 역할 수행결과에 따라오는 부모의 평가 멘트였다.  하지만 인생이란 게 나이와 가져야 할 능력이 비례하더라. 그저 예쁘고, 착하기만 하면 됐었던 어린 막내딸은 어느새 집안의 걱정거리가 되어 있었다. 나는 온 집안의 문제를 버텨내고 감당해 내느라 힘들었는데, 오히려 내가 문제라니.. 담담하게 받아들이기엔 너무 아팠다.

 

20대까지의 내 인생은 내 부모의 프랜차이즈점이었다. 그것도 망한 지점..

그 누구도 시원하게 원망하지도 사랑하지도 못하느라 긴 세월을 옆으로 흘려버리고, 머리로는 그러면 안 되는 걸 알면서 좌절할 때마다 스스로를 더욱 유전자의 노예로 만들었다. 그 와중에 부모에게 가장 듣고 싶었던 말은 "그럴 수 있어. 괜찮아. 네 편이야."같은 흔한 편들어주기 멘트였다.

안타깝게도 우리 가족은 "가족이니까 이런 말 해주는 거야. 더욱 겸손해라."로 끊임없이 서로를 단련시켜 주는 스타일이라 지금 남편을 만나기 전까지는 그런 소통방식이 가슴 아프면서도 유일무이한 옳은 방식이라고 생각했다.


남편은 직장에서 처음 만나게 되었다. 그의 첫인상은 서글서글하고 나쁘지 않았지만, 사람을 천천히 지켜보는 나와는 달리 아무하고도 쉽게 잘 지내는 느낌이라 내 스타일은 아니었다.

워낙 일에 몰입이 과한 스타일인 내가 보았을 때는 나보다 일을 잘하면서 매사 적당히 하는 느낌이었고, 그저 즐거울 거리만 찾는 낙관주의자로 보였다. 그렇다고 영 가벼워 보이진 않았던 게 워낙 목소리나 인상이 호불호 없이 좋은 느낌을 주는 편이라 모두가 그를 좋아했다. 그를 한마디로 설명하자면 "폭신폭신한 곰돌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는 모두에게 그렇듯 내게 적절히 다정했고, 나중에 내게 이성적인 관심을 긴 시간 동안 표현했을 때도 나는 극단적, 열정적 사랑 표현에 익숙해져 있던 터라 크게 감흥이 오지 않았다.

 하지만 말랑한 내 마음은 시간의 물량공세를 이길 수 없었다. 가랑비에 옷이 젖듯이 여러 계절을 걸쳐 그는 내게 스며들었고, 연인을 거쳐 결국 음식 취향까지 닮은 부부가 되었다. 비교적 최근에 식습관이 비슷해졌다고 생각했는데, 어느 날 떠올려보니 직장동료였던 시절부터가 시작이었다.

평양냉면 찬양자인 내가 한 겨울에도 평양냉면이 먹고 싶어서 작은 소리로 의견을 내면, 그는 사람들을 이끌고 평양냉면집으로 갔다. 당시 그는 평양냉면의 참맛을 모르는 일반인(?)이었고 곤욕스러운 표정을 애써 숨기며 한 그릇을 다 비워냈었다.


나와 비슷한 가정의 결핍을 가진 친구의 작은 물음에 순식간에 여러 기억이 떠올랐다.

또 생각해 보니, 결핍 없는 가정이 어디 있겠나 싶다. 어렸을 때는 볼 수 있는 세상이 내 코앞인데, 그걸 모르고 유난을 떨며 아파했던 어린 시절의 우리가 웃프다. 나는 아직도 결혼이 무엇인지 잘 모르겠고, 세상은 과한 설렘과 과한 두려움을 안고 있는 사람들이 많은 것 같다.

그래서 그냥 내 이야기를 말해주었다. 평범하고 단 하나밖에 없는 나의 결혼이야기.

그날 나는 그녀에게 이렇게 대답했다.


"나도 아직 잘 모르겠어. 결혼이 무엇인지는 잘 모르겠어. 너도 알다시피 나는 결혼에 부정적인 사람이었잖아. 근데 그런 내가 왜 결혼을 결심했는지는 알 것 같아.

나는 이 사람이랑 드라마 같은 알콩달콩 결혼 생활을 꿈꾸진 않은 것 같아.

그냥 이 사람이랑은 그래도 해낼 수 있을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어.

그를 선택했다는 그 이유로 어려운 일이 계속해서 밀려오겠지만, 이 사람과 함께라면 같이 해낼 수 있을 것 같다는 느낌 말이야.

그래서 결혼했어."


우리 부부는 2년 반을 연애하고 결혼식을 올렸다. 누구나와 같이 참 많은 일이 있었다.

잘 다니던 직장을 그만둬야 했고, 가족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꿈으로만 꾸던 카페를 차려도 보았다. 새로운 직장에 취직해서 눈물바람으로 버티며 결혼 준비를 하는 동안에는 이게 맞는 건지 매일 고민하던 날도 있었다. 그러나 죽을 둥 살 둥 애쓰는 한 인간의 노력에 하늘이 감동하셨는지 초고속 관리직급 승진과 축복받는 결혼식을 동시에 치러낼 수 있었다.


그리고 나는 결혼식을 올린 지 4개월 뒤, 아주 시원하게 웃으며 대차게 회사를 그만두었다.

가정주부에 큰 뜻이 있지도 않고, 경제적으로 매우 여유로운 삶도 아니지만

지난 시간 동안 어린아이에서 멈춰있었던 내가 결혼으로 인해, 비로소 다시 크기 시작했다고 느낀 게 가장 큰 계기였다. 아이러니하게도 누군가와 평생 함께 하기로 했는데, 비로소 나로서 살아가고 있다고 느끼고 있는 것이다.

이제 좀 커보려니 더딘 속도에 어려움도 많지만, 그래도 열심히 해낸 지난 몇 년을 돌아보면 스스로에게 "고생했네. 잘하고 있어." 등을 두들겨 줄 정도는 되는 것 같다.

그 힘들었던 시간들이 지나고 나니, 재밌었다고 느끼고 있는 걸 보니, 인생이란 정말 재미있다.

친구를 만나고 돌아온 날 저녁에 나는 남편에게 고맙다고 말했다.


"너를 만나고 멈췄던 성장을 다시 하는 기분이야. 내가 잘 커볼게. 고마워!"


험난했던 순간, 포기해야 하는 순간에 나는 계속 밀어붙이기를 선택을 했고, 지금은 조금 멀지만 아주 좋은 경치가 눈앞에 보인다.

올라선 곳에서 잠시 숨을 고르며 지난날을 내려다보고, 다시 발을 들어 계속 올라가기 위해 적어보는 이야기이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