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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흰둥이 Oct 18. 2023

커리어 우먼이 꿈인 여자

1. 결혼을 위하여

그날은 급작스러운 사정으로 주말근무를 하고 오후 3시 즈음 지친 상태로 집에 돌아왔다. 실제로 근무한 시간은 몇 시간 되지 않았지만 중요한 업무를 처리하느라 너무 집중했던 탓일까. 온몸에 진이 다 빠져버렸다. 구두를 신기 위해 신었던 살색 발목 스타킹을 큰 동작으로 휙휙 벗어서 구석에 던지고, 느릿느릿 바닥에 드러누웠을 때야 주말의 달콤한 시간을 시작할 수 있었다.


나는 수입차 브랜드에서 일하고 있었다. 쉬운 업계는 아니지만 나에게 적성이 맞았고, 무엇보다 정장을 깔끔하게 차려입는 것이 마음에 들었다. 어릴 때부터 유니폼을 입는 직업을 동경해 왔는데, 내게는 정장이 유니폼이 되어주었다.

프로모션을 강하게 진행할 때는 정말 일에서 눈코 뗄 수 없게 바쁘게 지내야 한다. 수입차 브랜드에서 일하는 것은 굉장히 화려하고 자극적이고 즉각적인 면이 있다. 아직 추운 겨울에 셔츠 등판이 땀에 흥건해지도록 뛰어다니면서도 구두와 향수는 늘 함께 해야 한다는 뜻이다.


아빠는 평일 저녁, 주말에 가끔 내게 전화를 해서 막내 공주가 얼마나 잘 지내고 있는지 꼬치꼬치 캐물어 댔다.

경상도 시골에 살고 계시는 중년의 아버지에게 서울(지방사람들은 서울과 경기, 인천을 정확히 구분하지 않는다.)은 아주 무시무시한 곳이다. 뜨끈한 바닥에 몸을 녹이고 있을 때, 아빠에게 전화가 왔다.

"능력 있으면 굳이 결혼하지 마. 옛날에나 그랬지. 요새는 여자들도 다 배우는데."

살면서 이런 말은 여러 번 들어봤다. 모순과 차별이 가득하고, 남녀 모두가 기분 나쁠 말이지만, 내게 저런 말을 해준 사람들은 모두 나를 사랑하는 사람들이었다.


내가 사회적으로 경력이 쌓이고 급여가 올라갈 수 록, 특히 아빠가 나중에 결혼하라는 말을 자주 하셨다.

우리 부모님 세대까지는 아무래도 아내의 역할이 조금 고되다 보니, 당신의 딸들에게는 고생하지 말라는 말을 해주려는 것 같다. 개인적인 의견으로는, 실제로 살면서 많은 차별을 겪었지만, 딱히 내가 "여자라서"라기보다는 세상 살면서 겪는 다양한 일들 중에 한 종류를 경험했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생각하는 편이 내게 이롭다.

회사를 다니는 동안 내 급여는 꽤 높은 편이었다. 그곳은 매우 경직된 분위기의 조직이었지만 성과에 따른 인센티브가 높은 편이어서 초고연봉은 아니더라도 스스로 만족할 정도의 급여와 결과물을 만들 수 있었다. 커리어우먼의 알맞은 정의는 모르겠지만, 나름대로 커리어를 잘 쌓아가는 여성의 모습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까라면 까야지. 어떻게든 완수해내야 한다." 회사 사훈이 있었다면 아마 저 문장일 것이다.

남성비율이 극단적으로 높고, 실적을 내야 하는 조직의 내부생활에서 부드러운 분위기란 사치일 뿐이다.

여자가 몇 명 없다고, 대우받을 수 있을 거라 기대하는 것은 오히려 아주 짧은 생각이다. 나는 눈치가 꽤 빠른 편이라 이곳에서의 나는 말만 많은 계집애처럼 보이지 않아야 한다는 것을 빨리 알아챘다.

 다행히도 나는 그런 부분에서 좋게 보일 자신이 있었다. 너무 말랐다는 말을 항상 듣지만 몸을 써야 하는 일이 주어지면 머뭇대지 않으려 했다. 누구한테든 지기 싫기도 했고, 내가 큰 힘을 보태진 못해도 1인분은 하겠다는 의지를 보여주고 싶었다. 다나까 말투는 내 성향상 이미 편안하게 쓰고 있었고, 사람들에게 깍듯해 보이도록 노력했다.

거리감이 다소 느껴지더라도 제대로 유머스러울 자신이 없다면, 격식을 차리는 편이 오히려 호감을 일으킨다는 것이 내 경험에 의하면 옳았으니까.

일하러 온 곳에서 개인의 사정은 불필요하다고 여겨지지만, 또 동시에 나만의 분명한 무기를 가지고 있어야 지속적인 성과를 낼 수 있었다. 정말 다방면적으로 수준을 끌어올려야 하는 회사에 잘 걸린 셈이다.

그러니 버티면 버틸 수 록 나는 더 성장하고 있다는 것을 체감했다. 구두를 신고, 내 몸보다 커다란 배너를 몇 시간씩 나르는 일은 나에게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건 마치 운동 같아서, 나를 더욱 단련시켜 주는 느낌으로 받아들였다.


함께 일하던 한 선배님은 나와 세 살 차이의 싱글맘이었다. 그녀를 처음 만났을 때, 같은 부서에 유일한 동성이라 눈이 간 것도 사실이지만, 작은 체구에 다정한 얼굴이라 마음이 쉽게 열렸고 친해지고 싶었다.

내가 입사하기 전에 그녀는 회사 내에서 이성적으로 안 좋은 파문에 한 차례 휩쓸렸었다. 그 후 얼마 되지 않아 내가 입사했고, 아무것도 모르는 나는 그녀에게 간택되어서 한동안 매일같이 도돌이표를 찍는 하소연을 들어야 했다. 그녀는 자꾸만 내게 회사와 다른 선배들을 험담했고, 여자라서 불행한 일들을 몇 시간이고 늘어놓았다.

실제로 겪은 사실이기 때문에 부정할 수 도 없고 같은 여자로서 불쾌하고 안쓰럽기도 했지만, 왜인지 모르게 자꾸만 내가 남자직원들을 미워하게 만드는 느낌이 들었다.

그녀는 업무 능력이 우수한 사람이었다. 외모도 훌륭했고, 악의가 있는 성격도 아니었다. 하지만 살면서 그녀 같은 사람을 너무 많이 만나버린 탓일까?

남자, 결혼을 떠올리면 마음속에 얇은 벽이 하나씩 생기더니, "능력 없이 결혼하면 불행해진다."는 중간 지점을 점점 넘어서서 기어코 "결혼을 안 하기 위해 능력을 키워야 한다."는 단단히 편협한 사고까지 하게 되었다.

그런 결론에 영향을 끼친 여자들이 대부분 엄청 나쁜 사람이란 생각이 들지 않았기 때문에 더더욱 '슬프지만 강력한' 결심으로 매듭이 지어진 것이다.


남자친구는 그 선배가 사람이 나쁜 사람은 아니지만, 너무 가까이하지 말라고 했다. 그냥 적당히 거리를 두는 게 정신건강에 좋을 거라며 내가 그 선배에게 끌려다닐 때마다 답답해했다.

사실 그 선배를 괴롭힌 파문의 진실은 모두가 알고 있었다. 그녀는 아내가 바람 펴서 이혼진행 중이라는 남자의 거짓말을 믿고 내로남불로 본인도 내연녀가 되었다가 상간녀 소송에서 졌다. 당연히 적금을 깨서 위자료를 지급해야 했다. 그 와중에 곧 초등학생이 되는 딸을 학군이 좋은 동네에서 키우려고 본인에게 무리인 금액대의 집으로 이사를 준비하고 있었다.

그런 멋없는 원동력으로 열심히 일해서 커리어 우먼이 된 것이다. 아무리 주변에서 수군대고, 면전에서 대놓고 무시할수록 그녀는 더욱더 높은 커리어를 쌓을 뿐이었다.

그녀를 보면 볼수록 모든 게 모순이었다. 아니. 커리어 우먼이란 말 자체가 무슨 의미가 있는지 의구심이 들기도 했다. 커리어 우먼이 된다고 해서 인생 모든 부분에서 혼자서 당당하고 행복한 여자가 되는 건 아니었다.


그 여자선배는 얼마 후, 내게 새로 관심이 가는 남자에 대해 상담을 요청했다. 바보같이 설레는 표정이었다. 응원과 도움이 될 만한 이야기를 잠깐 나누고, 내 책상에 앉아 당월 마케팅 계획을 짰다. 내겐 꽤나 곤욕스러운 업무가 마케팅인데, 그날은 생각보다 업무가 물 흐르듯이 해결되어 퇴근 전에 품의까지 마칠 수 있었고, 가벼운 마음으로 다시 자리로 돌아와 앉아서 잠시 음악을 들었다.

이전에 듣다가 멈춘 노래가 다시 재생되었는데, 한동안 아침 출근송으로 유용하게 활용했던 노래였다. "돈 많이 벌어서 하고 싶은 거 하고 살자."는 단순한 가사에 에너지 있는 노래를 따라 흥얼거리며 책상을 정리했다.

그리고 자동 랜덤 재생 모드로 인해, 뜻하지 않은 노래가 흘러나왔다. 너라는 바다에 푹 빠져버렸다는 시적인 가사에 간질간질한 멜로디의 노래였다. 이유 없이 굉장히 당황스러웠다.

남자친구와 사귀기 직전에 서로 노래 추천을 자주 주고받았는데, 내가 그에게 들어보라며 추천해 주었던 노래였다. 아주 여우같이 굴었던 자신이 떠올라 민망스러우면서 우스웠다.

둘 중에 선택하라면, 나는 무조건 일 잘한다는 소리 듣는 여자이고 싶었는데 사랑에 빠져서 유치한 말장난에 하루를 고민하는 건 어떻게 자제가 좀 안 되는 걸까?

커리어 우먼도, 사랑에 빠진 여자도 내가 분리하고 싶다고 분리가 되는 게 아니구나. 인간이란 복잡해 정말.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여전히 이삼십 대에는 연애나 다른 것보다 본인의 커리어와 높은 목표에 조금 더 집중해 보는 게 좋다고 생각한다.

정말 멋진 삶의 모험을 해보는 것이다. 내가 어디까지 성장할 수 있을까? 세상에 어떤 것들이 나를 기다릴까? 그런 마음으로 말이다. 이런 긍정적이고 장기적인 마음가짐을 어린 나이에 가지기란 쉽지 않다. 그래서 나 역시 내 가치를 남자친구나 sns에서 찾으려 하거나, 무기력함을 못 이겨 이직을 선택하기도 했다.


이 문제를 가지고 너무 오래 헤매지 않아야 한다는 걸 조금 더 빨리 깨달았었다면, 나는 보다 더 행복하게 일했을 것 같다.

처음에 사회생활을 시작하면 당장은 쥐꼬리만 한 월급에, 스펙으로 쓸 수 도 없는 가치 없는 업무를 맡고 있는 것 같겠지만 그걸 겪어낸 후에야 알 수 있었다. 내가 피해야 할 것과 감내해야 할 것을.


커리어의 진짜 뜻은 자기 효능감에서 나오는 꽤 쓸만한 가치판단력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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