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공동의 적을 위하여
내가 다니던 회사에는 조금 독특한 문화가 있었다. 실제 결정권자로 불리는 상무에게 호출을 받으면, 그 어떤 일이 있어도 곧장 응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했다.
아르바이트생부터 팀장들까지 모두 단 한 사람을 모시며 일하는 분위기라 농담 삼아 여기는 북한이라고들 이야기할 정도로 그 상무의 말은 법과 같았다.
상무는 나를 좋아했다. 남녀직원 간의 이성적인 문제로 인력손실이나 회사에 여러 가지 피해를 끼치는 경우를 많이 봐왔기 때문에 나같이 얌전하고 단정한 스타일이 아주 마음에 든다고 늘 말했었다.
그래서 비밀 아닌 비밀 사내 연애를 시작했을 때, 나는 상무에게 조금은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내가 원한 것은 아니지만 누군가의 믿음을 배반한다는 입장에 서야 하는 찝찝함이 미안함으로 스쳐느껴진 것이 아닐까.
높은 자리에서 오랫동안 있으면, 사람이 점점 바보가 되는 것 같다. 좋은 경영인들은 성에 갇힌 공주처럼 되지 않으려고 그 맹점을 늘 경계하겠지만, 이 수령님께서는 선민의식과 우월감에 취해 극단적으로 통제하는 방식이 옳다고 믿고 있는 상태였다.
어느 날부터 상무는 나에게 이성적으로 관심이 있다며 자꾸만 나를 따로 불러내려 했고, 심지어 한 번은 손을 잡으려는 시도를 계속해서 했다.
죄질의 심각성 정도로 판단하자면, 그리 조악한 수준은 아니겠지만 나에게 직장 내 괴롭힘과 성추행 사건이 벌어졌다는 사실 자체는 몇 천 톤의 바위가 내 가슴에 쿵 떨어진 느낌이었다.
나는 직장에 계속 다니고픈 마음에 정중하게 거절의 의사를 표현했다. 머리가 나쁜 사람이 아니라서 내 말을 잘 알아들을 줄 았는데, 말이 끝나자마자 그는 주름진 눈꼬리를 애써 위로 당겨뜨며 나를 위협했다.
상무는 내 눈을 쳐다보지 않은채 내가 먼저 꼬리쳤다는 뉘앙스의 말을 쏟아냈고 아주 황당하고 열받는다며 흥분된 목소리로 나를 다그쳤다.
영업을 통해 갈고닦은 불만고객 대처법을 여기서 써먹을 줄은 몰랐지만, 그의 성난 가스라이팅에 굴하지 않고 평화타협하고자 하는 의지를 마구 뿜으며 설득 스피치를 펼쳐보았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되돌아 오는 말은 모두 평화와는 거리가 먼 이야기 뿐이었다. 그는 나보다 더 숙련된 화술을 안타까운 방향으로 쓸 줄 아는 업계 선배였고, 마음 먹은 것보다 더 마음을 단단히 먹어야 한다는 것을 피부로 느끼며 한참을 더 그의 말에 찔리며 앉아있어야 했다.
당시 회사 동료들은 잘 몰랐겠지만, 나는 겉보기에 참 얌전한 사람이라 속도 물렁할 것 같지만 오히려 속이 약한 사람은 아니었다. 그날부터 약 일주일 동안 그 상무의 집무실에 시도 때도 없이 불려 가 다양한 폭언을 귀로 들으면서 열심히 녹음을 했다. 추후 사건조사가 진행되는 동안 많은 동료들이 나를 보며 혀를 내둘렀다.
정말 이런 사람인 줄 몰랐다고. 약간 도라이 같다고도 하더라.
그도 그럴 것이 나는 큰일이 나면 더욱 차분해지는 편이다. 요새 말로 '찐 광기' 이런 표현을 가끔 듣는다.
상무의 말도 안 되는 궤변을 듣다 듣다 '더 이상 나에게 이런 행동을 하지 마'라고 말했을 때 그의 벙진 표정이 아직도 기억에 생생하다. '네가.. 이렇게 차가울 수가..' 라며 경악을 금치 못하는 표정을 짓는 쪽은 내가 아니라 가해자였다. 피해자는 나인데.. 그가 훨씬 더 힘들어했다.
상황이라는 조각들이 모여서 하나의 세련된 그림이 만들어지는 것이 세상이라고 생각했던 날들도 있었다.
하지만 진짜 세상을 살면서, 사람을 대하는 직업을 택하면서 알게 된 것은 세상은 자루에 담긴 폐유리병 조가들과 닮아 있다. 모든 단면은 날카롭기만 해서 서로 맞추기가 어렵다.
그저 내 조각이 더 단단해서 깨지지 않아야 한다. 당장은 그것만이 중요한 것이다.
나는 참고 있었을 뿐인데, 상무도 일부 사람들도 내 덤덤한 표정을 보고는 사건의 발단을 나에게서 찾으려 했다. 상무에 편에 서서 나를 욕하며 유언비어를 퍼뜨리고 나를 돕지 말라는 직원들도 있었다. 불과 얼마 전까지 같이 밥을 나누어 먹던 '식구'로 여기던 동료들이었다.
이쯤에서 많은 사람들이 궁금하겠지만 그렇다면 구호기관에서는 어떻게 진행했느냐 일 것이다. 회사에서의 대처는 안타까울 정도로 미흡했고, 나는 결국 노동청과 경찰에 도움을 요청했다.
남자친구는 나를 지켜보며 별 말을 하지 않았다. 나를 돌보고 도울뿐, 말로는 그 어떤 직접적인 위로를 하지 않았다. 사건을 본격적으로 조사하는 동안 나는 유급휴가를 가졌다. 휴가라고 읽는다고 정말 휴가는 아니지 않겠나. 꿈을 이루고 꾸던 내 집은 어느새 침침한 암막커튼이 주인공인 작은 방으로만 느껴졌다.
이후 남자친구는 매일 아침 출근하는 길에 나의 집에 들러 커튼을 걷고 창문을 반쯤 열어두고 갔다. 며칠째 아침마다 억지로 깨야 하는 불편함에 참다못해 그에게 물었다.
"도대체 왜 자꾸 창문을 열고 가는 거야?"
"환기를 시켜야 해. 여기서 꽁꽁 닫고 있으면 우울해질 거야. 환기시키면 덜 우울할 거야."
그리고 퇴근을 하면 곧장 내 방으로 찾아와 밥을 먹이고 나를 이불 안에 밀어 넣었다. 나는 말똥말똥한 눈으로 그를 지켜보았다. 불편한 정장을 입고, 그 수많은 녹음을 매일 직접 들으며 속기를 준비하는 그의 옆얼굴은 자꾸만 일그러지고 한숨을 쉬었지만 이따금 고개를 돌려 나를 볼 때는 웃고 있는 얼굴이었다.
남자친구가 국민청원에 내 이야기를 올렸고, 많은 사람들이 그 글을 공유하고 공감해 줬다. 그리고 수많은 기자들이 회사로 전화를 해대는 통에 나중에는 전화를 받는 직원이 기자에게 연락이 올 때마다 나에게 곧바로 전달을 해버렸다. 전국적인 업계 단톡방에 내 이야기가 올라가고, 인터넷에 기사가 올라가기 시작하자 브랜드 본사 담당자가 드디어 일을 똑바로 처리하겠다며 칼을 빼들었다.
하루종일 할 일이라곤 방에 스스로를 가두고 생각을 생각하는 것 말곤 할 게 없었던 며칠 동안 나는 참 많은 연락과 응원과 도움을 받았다. 내가 잘못 살진 않았구나 싶어서 힘이 났지만, 나는 더 이상 이 업계에 발을 들일 수 없게 된 현실을 마주해야 했다.
바보같이 그렇게 당하고도 이 일이 좋았던 나는 이직 자리를 슬며시 물어보았다. 모두 미안하다며 문제를 일으키는 나 같은 사람은 받아줄 수 없다는 거절만이 돌아왔다.
일이 없다면, 내가 여기에 살 이유가 없었다. 아니 일을 할 수 없다면 내 인생에 의미가 없었다. 일하는 내가 아닌 나를 잃어버린지 오래였다.
그런 상태로 고향에 돌아가고 싶지도 않았고, 여기를 떠나고 싶지도 않았지만 이곳은 나를 자꾸만 밀어내서 당장 생업 플랜비를 만들어야 했다.
그러나 나는 지금도 옷방 안 가장 손이 가기 좋은 자리에 회사를 다닐 때 입었던 정장을 깨끗하게 드라이해서 걸어둔다. 그 이후로 단 한 번도 입은 적이 없지만 오히려 자주 입는 옷들을 불편하게 서랍에 넣어서라도 빳빳한 정장들을 소중히 보관하고 있다.
지금까지 이렇게 벗어나지 못할 걸 알았었다면, 나는 끝까지 매달려서 그곳에 남았어야 했을까.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영원히 찾을 수 없을 것 같다.
남자친구는 자꾸만 내게 친언니가 살고 있는 거제도로 같이 가자고 했다. 그리고 앞으로 하고 싶은 게 무엇이냐 물어보았다. 내가 하고 싶은 일은 어차피 못하게 된 마당에 예전부터 카페를 차리고 싶었다는 대답을 듣더니 그럼 카페를 차리면 되겠다며 아주 간단한 사고회로를 마친 것처럼 마구 일을 진행시켰다.
나는 그때까지도 아빠와 가족들에게 이 사건에 대해 제대로 이야기하지 못하고 있었다. 우선 그들이 별로 안 듣고 싶어 할 것 같았고, 우리 가족이라면 나에게 버티라고 하거나 본인들이 더 스트레스받는다는 반응을 할 것 같아서 그 반응을 보고 내가 더 스트레스받고 싶지 않아서 자세히 말하지 않았다.
어떤 일을 진행하기로 마음먹으면 경주마가 되는 그는 본인의 어머니와 이야기를 하고 오겠다며 내게 선언을 했다. 무슨 이야기를 어느 정도까지 하고 온다는 것인지 불안했지만, 내심 그와 함께하길 원했기 때문에 그를 믿고 보내주었다.
몇 시간을 초조하게 기다리다 그가 돌아왔고, 그는 빨간 눈으로 아무 말하지 않고 내게 와락 안겨왔다.
당시 나는 그가 어머니와 어떤 대화를 나누었는지 자세히 듣지 못했지만, 나중에 우리의 상견례 자리에서 어머니는 울먹이며 말씀하셨다.
"우리 애가 어느 날 나에게 할 말이 있다고 연락이 왔을 때, 무언가 결심해야 한다는 것을 직감했어요. 아이가 여자친구의 상황을 설명하더니 이 사람을 너무 사랑하기 때문에 이대로 보낼 수 없다며 둘이 함께 친언니가 살고 있는 지역으로 내려가서 카페를 차릴 거라고 하더군요. 얼마나 서럽게 울던지. 같이 많이 울었습니다.
따님은 많이 강하고 현명한 사람이고, 제 아이도 믿음직한 아이라 둘이라면 잘 해낼 거라고 생각했어요."
나는 계속해서 거제도행을 망설였지만, 그의 고집스러운 리드에 결국 함께 내려가기로 동의했다.
아직 나의 부모님께는 제대로 허락을 받지도 못했고, 카페를 준비할 시간도 턱없이 부족했다.
당장 필요한 살림살이만 택배로 이사하기로 한 집에 배송시켜 두었고, 그가 정신적 스트레스로 눈 한쪽을 못 뜨고 다닐 때쯤에야 대출이 나왔기 때문에 그는 약을 먹으며 출근을 강행해 오다 대출 승인이 나자마자 바로 사표를 냈다.
그 몇 주 동안 우리는 번갈아 가며 서로의 간호자가 되어 주었다. 하루는 내가 누워 있던 자리에 다음 날에는 그가 누워서 끙끙 앓으며 고통을 신음했고, 우리는 어제의 내가 아팠던 것은 까맣게 잊고 서로를 치료하는 것에 집중했다.
그것도 나중에는 병원놀이처럼 역할을 바꾸는 모습이 조금 웃기기도 했다.
동시에 아프지 않은 것은 '그래도 살아나가라고.' 하늘에게 작은 자비를 받은 것 같다고 혼자 생각했지만.
최소한의 준비가 되자마자 우리는 뒷유리가 잘 안 보일 정도로 차 안 가득 짐을 싣고, 무작정 거제도로 차를 몰았다. 무슨 야반도주하는 것 같다며 우스갯소리가 절로 나왔다. 말도 안 되는 일을 벌이기 위해, 나의 가족이 살고 있는 낯선 그곳으로 떠나면서 나는 생각했다.
한 치 앞도 모르겠어. 하지만 하고 싶은 대로 해보고 싶어.
우리가 만난 지 반년만에 벌어진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