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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흰둥이 Oct 20. 2023

사랑스러운 인연을 기억하는 방법

2. 공동의 적을 위하여

거제도에 와서는 당장 둘 다 직업이 없었기 때문에 모아둔 돈을 마냥 까먹어야 했다.

처음 며칠이야 부동산 갔다가 놀고 시장 조사를 한답시고 맛집 탐방도 했지만, 계속 그렇게 여유로울 순 없는 노릇이었다. 정신을 차리고 스스로 설정해 둔 데드라인에 맞추기 위해 얼기설기, 얼렁뚱땅 하지만 정성 들여 하나씩 미션을 깨다 보니 쌀가루로 만든 디저트 카페를 오픈할 수 있었다.

매우 미흡하나 나름의 시장 조사를 했을 때, 젊은 부부가 많았고 자녀들에게 좀 더 좋은 먹거리를 찾는 젊은 엄마들을 타깃으로 한 아이템이 필요한 곳이었다.

아주 오래전부터 카페에 대한 꿈을 꾸었기 때문에 바리스타 자격증이라든지 기본적인 베이킹은 할 줄 알았다. 시중에 판매하는 쌀가루 디저트는 메뉴가 한정적이길래, 밀가루베이킹 중에서도 가장 인기가 많은 종류와 오히려 흔하지 않은 종류의 디저트를 쌀가루 그리고 좋은 재료로 만들어서 판매를 했고, 다행스럽게도 그 선택이 통했다.

지역 내에서 나름 이름을 알리게 되었고, 유명한 유튜버들의 방문도 이어졌다. 카페에 와주신 모든 손님에게 감사하지만 아직까지 기억에 진하게 남는 몇 명의 인연이 있다.


오픈 초기에 아주 조용히 문을 열고 들어온 여자 한 분이 있었다. 한 여름이라 뜨거운 햇빛을 피하기 위해 모자를 썼다고 하기엔 약간 독특한 차림이었다. 챙이 넓은 모자에 마스크를 쓰고 목에는 얇은 천을 두르고 있었다. 이까지야 그럴 수 있겠다 싶지만 팔토시를 한 상태에서 간절기용 긴팔 남방을 입고 계셨는데 처음 그 모습을 보고 있자면 약간 수상한 느낌이 들 정도였다.

오픈 준비 기간이 두 달도 채 되지 않았기 때문에 카페가 어수선한 느낌이 강하게 들었을 텐데, 그 속에서 그분은 혼자 미묘하게 안정적인 오라를 풍기며 서 있었다. 진열된 디저트들을 하나하나 천천히 둘러보다가 주문을 하셨는데, 정말 깜짝 놀랐다. 왜소한 체형의 손님은 적어도 4~5인분은 넘을 양을 모조리 포장해 달라고 하는 것이다.

장사가 잘 되면 좋은 일이지만, 속으로 고개를 갸웃거리며 담아드렸고 끝까지 조용히 카페를 나가셨다.


그 후로도 두어 번 혼자 또는 어머니와 오셔서 어마어마한 양을 포장해 가셨고, 조금씩 서로의 인사가 어색하지 않을 때 즈음 내게 조용히 말을 거셨다.

손님은 밀가루를 먹지 못한다고 했다. 어떠한 병 때문에 밀가루를 먹지 못하는데 디저트를 참 좋아한다고 했다. 이 카페에는 보통의 글루텐프리 디저트에서 기대할 수 없는 다양한 종류가 있어서 이곳을 올 때마다 잔뜩 사서 냉동고에 쟁겨두고 먹고 있다고 말했다. 머리카락이 희끗하신 그녀의 어머니와 아버지는 주기적으로 카페에 오셔서 따님이 예약해 둔 케이크 조각과 디저트를 찾아가셨고, 케이크 한 판을 주문하여 가져가는 날도 점점 많아졌다.


그날도 한 판 짜리 케이크를 픽업하러 오셨고, 그녀는 두 번째로 먼저 말을 거셨다.

"마틸다 제가 좋아하는 소설이에요. 이 케이크 실제로 먹어보고 싶었어요. 감사합니다."

그녀가 주문한 케이크의 이름은 마틸다 케이크였다. 동명소설을 원작으로 한 영화 "마틸다"에 나오는 무시무시한 크기의 초콜릿 케이크를 우리 식대로 구현한 것인데, 사실 호불호가 갈릴 거란 생각에 내놓기 직전까지 꽤 망설였던 디저트였다.

그녀와의 사적인 대화는 저렇게 단 두 번이 전부였다. 더 많은 대화가 있었다고 해도 매일 베이킹 전투에 참전하던 시기라 기억할 여력이 없었을 것이다. 베이킹은 절대로 요행이 통하지 않는 일이었다.

그동안 기술적인 성장에 기대어 살던 나를 반성하게 하는 '고행'으로 느껴질 정도로 굉장히 순수한 노력의 결정체를 만드는 일이었다.

원치 않게 떠밀려서 온 곳에서 생업이란 마음가짐이 너무 강해지자 꿈도 희망도 점점 희미해지고 있었던 시기였는데, 내 처절한 몸부림으로 누군가에게 작고 오래된 꿈을 선물한 것 같아서 인생이란 완전한 비극도 완전한 희극도 없구나라고 생각했다.

나는 그 손님을 떠올리면 뿌듯함의 기쁨을 느낀다. 마틸다 케이크의 달콤함이 그녀의 기쁨주머니에도 들어가 있기를.


위에서 표현한 것과 같이 아주 복잡하게 얽혀있는 인생이라는 유기체는 조금만 정신을 놓으면, 선물과는 정 반대로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기도 한다.

이십 대 초반의 여자 손님은 위에 분처럼 아주 많은 양을 사가지 않았지만, 자주 카페로 와 음료와 디저트를 즐기는 단골 중 한 명이었다.

순수함이 얼굴에 말갛게 올라오는데, 귀엽다는 생각을 자주 했던 것 같다. 나는 귀여운 여성을 보면 적극적으로 다가가고 싶어 하는 이상한 심리가 있다. 살금살금 다가가 말을 걸었고, 약간의 대화만으로도 그녀와 나는 많이 닮아있다는 것을 알아챘다. 나중에 알고 보니 MBTI까지 같았고 그 계기로 급격하게 친해져서 서로 작은 선물을 주고받는 사이까지 발전하게 되었다.


모든 내향인이 그런 건지 몰라도, 나는 상대와 거리가 너무 가까워지면 갑자기 마음이 불편해진다. 내가 원했던 거리는 딱 이 정도인데, 상대방은 내 친절한 말에 아무것도 모르고 불쑥 내 가드라인을 넘어서 들어오려 한다.

오래전부터 스스로가 문제인 줄 알면서도 어떠한 근본적인 해결책을 찾지 못하고 앞에서는 꾸역꾸역 '나도 즐거운 척, 얼마든지 드루와 드루와.' 연기를 해왔다. 그 마음이 전부 거짓은 아니었고 오히려 진심이 훨씬 컸지만, 이상하게 오작동되는 브레이크는 늘 나를 겁먹게 했다.

그녀와 만나면 정말 다양한 주제의 이야기를 나눴다. 대화를 하는 시간 동안 몽글몽글 피어나는 따뜻한 감정은 교류한다는 느낌을 받았기 때문이다. 서로의 말과 생각을 기분 좋게 받아들인다는 느낌.

후반에 카페를 접을지 고민하던 순간에도 그녀에게만은 살짝 귀띔을 해주었는데 그녀는 잘 고민해 보라며 나를 응원한다고 했다.

그럼에도 나는 큰 실수를 하고 말았다. 그녀를 포함한 대부분의 단골들에게 간단한 인사도 남기지 않고 카페 문을 걸어 잠구는 행동을 선택했다.

전 회사의 사건으로 소송을 진행하면서 마음의 병이 깊어져서 어른스러운 마무리를 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음을 남자친구는 알고 있었지만, 나는 주변 사람들에게 회피하는 모습만 보여준 채 나의 카페를 마무리한 것이다.

시간이 흐르고, 그녀에게 내가 왜 그렇게까지 예의 없게 굴었을까 생각이 들 때마다 전과자처럼 평생 지울 수 없는 과오를 안고 사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그녀의 진심을 조금이라도 생각했다면, 그래선 안 되는 것이었다.



카페문을 닫고 나는 다시 새로운 길을 가게 되었지만 카페계정으로 운영하던 인스타는 차마 없애지 못해서 아주 가끔씩 손님들에게 DM이 오고 있었다.

"비난이 적혀있는 글을 보면 분명 무너질 거야." 마음을 단단히 먹고 애써 쌓여있는 DM을 읽지 않고 있었는데, 어쩌다가 손가락이 멍청이같이 알림 창을 눌러서 말 그대로 등 떠밀리는 꼴로 누군가의 마음을 마주하게 되었다.

"사장님 요새는 장사 안 하세요? 무슨 일 없으시죠? 자꾸 사장님 디저트가 생각나요. 친절하고 예쁜 두 분도 그립고요. 언제든 다시 돌아오시면 또 갈게요!"


아-. 나는 정말 정말 바보 같아.

나를 가장 비난하고 있던 사람은 바로 나였다. 남들이 나를 비난해도 나는 나를 감싸줘야 했는데, 내가 나를 가장 몰아세우느라 오히려 똑바로 바로잡을 용기까지 모조리 빼앗고 있었다.

그제야 애써 잊으려고 했던 얼굴들이 생각이 났다. 내가 앞이 보이지 않아서 더듬거리고 있을 때, 당장 빛을 내려주진 못해도 뒤에서 나를 밀어주던 사람들.

카페를 하면서 나보다 더 고생했던 남자친구와 옆에서 지켜봐 주었던 언니네 부부, 불쑥 잔소리를 하러 오시지만 가족들 준다며 당신께서는 좋아하지도 않는 빵을 사가시던 주인 할머니와 옆 건물 소장님, 법원공무원에 합격했다며 친구들에게 한 턱 쏘기 위해 우리 카페 왔던 소진 씨, 같이 힘내자며 늘 사이다를 챙겨주셨던 김밥천국 사장님, 누텔라휘낭시에만 보이면 싹 쓸어가시던 외국인 단골, 라떼만세 어머님, 아침마다 "흑임자바치케 나오나요?.." 문자 하시던 미소천사 아가씨.. 셀 수 없이 많은 얼굴이 머릿속에 차례차례 스쳐 지나갔다. 가슴이 아팠지만 그래 이때다 싶어서 더 오래 선명히 떠올리려고 긴 시간 동안 그 얼굴들에 집중해 보았다.


이제 와서 사과한다고 있던 일이 사라지진 않겠지. 그렇다면 나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내가 과연 만회할 순 있을까. 아니 만회를 원하는 건 맞을까. 생각이 너무 깊어지면 마음도 눈도 눅눅해진다.

그때 '나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원하는 방향은 무엇일까.'로 생각의 방향을 바꾸니 금세 답이 툭 튀어나왔다.


"더 행복하게 살아. 그리고 받은 만큼 누군가에게 돌려주면서 살아. 그렇게 갚으면 돼."



[ 우리 행성은 우주의 어둠에 둘러싸인 외로운 티끌 하나에 불과하다.

작은 생명체로써 우리는 오직 사랑을 통해서만 우주의 광대함을 견딜 수 있다. - 칼 세이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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