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흰둥이 Oct 21. 2023

여긴 도대체 어느 시대인가요?

3. 퇴사를 위하여

불과 10여 년 전만 해도 우리에게 카카오톡은 존재하지 않았다. 내 마지막 2G 폰은 롤리팝이었는데, 당시 유명 기획사 소속 두 그룹이 선전하면서 큰 인기를 끌었고 최신폰답게 아주 신기한 신기능들이 탑재되어 있었다.

작은 점으로 이루어진 불빛을 이용해서 폴더 겉 화면에 나만의 커스텀을 할 수 있다니!

그 후 스마트폰이 등장하고, 카카오톡이 보편화되면서 형형색색 깜찍한 빛을 내던 롤리팝은 빠르게 잊혀졌다.

그렇듯 우리는 계속해서 발전하고 진화하는 세상에 살고 있다. 그 진화 속도는 더욱 빨라져서 세대차이라고 부를 수 있는 나이간격 또한 줄어들었고 심지어 예전에 가치 있다고 확신했던 것들이 지금은 전혀 틀린 것이 되기도 한다.

그래도 나는 기본적인 사회의 룰에 대해 평범한 수준의 자각이 있다고 생각해 왔다.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근본적인 옳고 그름의 판단가치는 변하지 않는다고도 생각했다. 나의 새로운 그리고 마지막 직장에 출근하기 전까진.


처음 이곳의 내 감상은 마치 정글 속에 던져진 기분이었다. 아니, 다중우주가 실제로 존재한다면 나의 일련의 사건들로 인해 또 다른 우주 속에 들어왔다고 하는 게 나을까. 그것도 아니다. 신인류를 만난다면 딱 이런 기분일 것이다.


전혀 경험해보지 않은 분야였지만, 그래도 내가 해왔던 업무와 비슷하면서 난이도는 더 쉬운 부서에 입사했다. 일 자체가 어렵진 않았지만 나는 운동과는 전혀 접점이 없던 삶을 살아온 종이인형이었다.

이곳은 헬스, PT, G.X, 필라테스, 골프, 사우나 등 다양한 종목과 레슨이 이루어지는 대형 스포츠 센터였다.

그중에서도 상담과 고객 관리, 매출관리 등을 주로 맡는 일을 했는데, 내 선임자는 나보다 8살이나 어린 여직원이었다. 그녀는 사회 경험의 대부분을 이곳에서 보냈기 때문에 나이는 어리지만 실무를 잘 알고 있어서 안심이 되었다. 어차피 같은 부서는 몇 명 되지 않고, 전부 트레이너나 레슨강사님이었기 때문에 내가 기댈 곳은 그녀밖에 없기도 했지만.


그녀는 나를 매우 경계했다. 그 짧은 사회경험으로도 사람이 들고 나는 일들을 몇 번 겪다 보면 처음 들어온 사람에게 쉽사리 모든 것을 오픈하기 힘들다는 것을 알게 된 모양이다. 더불어 서로 성향이 너무나 달라서 서로의 말 한마디 행동 하나가 이해가 안 되고, 썩 좋아 보이지 않는 것도 크게 한 몫을 한 것 같다.

나야 거의 10년이 어린 친구와 경쟁해 봐야 아무 의미가 없다는 것을 알지만, 그녀는 새로운 여직원의 등장이 마음에 들지 않아 보였다.

그녀와의 미묘한 불편함도 힘들었지만,

나를 더 힘들게 한 것은 한국말로 “동료직원들”이라고 불리는 신인류들이 매일매일 보여주는 아주 쇼킹한 광경들이었다.


내가 방금까지 앉아있던 의자에 신발을 신은 발을 올리고 신발끈을 묶는가 하면, 직원 휴게실 냉장고는 썩어가는 음식물로 가득한데 그 안에 먹을 수 있는 음식도 같이 보관하고 있었다. 온통 먼지가 가득하고 책상은 전부 끈적거렸다. 상사와 나이 차이가 족히 열다섯 살은 나는데도 다리를 떨며 험한 단어를 썼고, 정확한 보고체계도 꼭 지켜야 하는 룰도 거의 없었다.

심지어 회식을 하다가 피곤하면 그냥 센터에 매트를 깔고 잔다며 본인들끼리 아주 껄껄대며 웃는 것이다.

어린 직원들은 나에게 툭툭 갈구기용 농담을 했고, 나의 상사는 게으름에 빠져서 그 모든 문제점을 외면하고 있었다.

박수가 절로 나왔다. 이야.. 내가 살아온 세상은 도대체 무엇이었는가. 내가 추구한 가치가 사실 틀린 것이었나! 여기는 어느 시대 어느 세계인가!


초반에는 나도 뭐라도 해보려고 노력했지만, 그러면 그럴 수 록 나만 지친다는 것을 깨닫고 낮에는 무기력하게 자리만 지키다가 퇴근해서는 도대체 내가 이상한 것이냐며 남자친구를 붙들고 분노 어린 한탄을 반복했다.

그렇다고 당장 일을 그만두기엔 우리의 사정이 여의치 않았다. 긴 상의 끝에 올해 말에서 내년 초에 결혼식을 올리자고 결심을 했고, 부모님께도 계속해서 밀어붙이는 중이라 조금이라도 더 돈을 모아야 최대한 손을 벌리지 않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 무기력한 출근에 점점 익숙해질 때 즈음 갑자기 센터를 다른 사람이 인수한다는 소식이 들렸다.

원래 지분을 여러 명이서 나누어 가지고 있던 구조였는데, 나의 상사가 센터를 아주 말아먹고 있으니 다른 지분자가 아예 돈을 전부 내고 인수를 하기로 한 것이다. 매일 가슴속에 사표를 넣고 다녔지만 혹시나 새로운 대표가 이 상황을 변화시켜 줄지 모른다는 희망으로 나는 그곳에 계속 남기로 했다.


그로부터 1~2개월 동안 매일같이 울다가 잠이 들었다. 새로운 대표는 아주 지독하게 일을 시켰다. 단순히 일을 많이 시킨다는 것이 아니라 일을 쏟아붓고는 몇 분 뒤에 "아직도 안 했어? 너 좀 멍청하냐?"식의 지독함이었다.

나는 미션을 좋아한다. 그리고 역경이 닥치면 약간 변태 같지만 살짝 흥미가 올라오기도 한다. 그때는 흥미를 넘어서서 독기에 가까웠던 것 같다. '이것보다 더 힘든 조직에서 일했던 나인데. 내가 얼마나 잘하나 보여 주겠어.'라고 생각했다.

매일 아무도 시키지 않는 야근을 강행했다. 기본적으로 일을 좋아하기 때문에 나를 갈아서 성과를 내는 것은 내게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오히려 조금만 더 몸이 버텨주길 바라는 쪽이지. 

대표와 동료들이 혀를 내두르며 제발 집에 좀 가라고 나에게 "지박령"이라는 별명을 붙여 주었다. 그럼에도 나는 인기척을 크게 내지 않고, 계속해서 일했다.


나의 선임인 그녀는 갑자기 바뀐 상황에 매우 당황해하고 있었다. 말 그대로 꿀 빠는 직장이었는데, 진정한 업무가 주어지면서 자신의 부족한 점이 자꾸만 드러나게 된 것이다. 상사에게 혼나는 입장은 내가 아니라 그녀가 되었고, 그녀는 내키지 않지만 나와 친하게 지내려는 노력을 시작했다. 이제 와서 나랑 친하게 지내지 않아도 되니, 본인 성과를 더 올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지만 그녀와 내 성과는 갈수록 크게 벌어져만 갔다.

12월 특히 크리스마스는 아무래도 손님이 많이 오지 않는다. 그녀는 그래도 홍보 겸 오시는 회원님들을 위해 장식거리를 구매해서 센터를 꾸미자는 의견을 냈다. 나에게 동의를 구하는 눈빛을 보내길래 나도 함께 목소리를 내서 겨우 허락을 받을 수 있었다.

룰루랄라 신이 나는 발걸음의 그녀와는 달리 나는 조금이라도 더 마케팅을 짜야한다는 생각이 머릿속에 가득했다. 이번달은 전체매출이 천만 원 이상 떨어진 상태였다.


"쌤. 쌤이 이 업계를 몰라서 그런데, 그렇게까지 열심히 하지 마요. 이 업계에서는 지금이 제일 장사 안될 때고, 신년에 이벤트 터뜨리면 다시 엄청 매출 올라요. 내가 그냥 노는 것 같겠지만, 지금 최대한 에너지 아끼는 중인 거예요."

그녀는 단 한 달도 열심히 한 적이 없으면서 마치 너는 다른 시대, 다른 세계에서 와서 뭘 모른다는 말투로 내게 열심히 하지 않기를 권유했다.

"선생님. 저도 알아요. 지금 아무리 애써 봤자, 이번달은 매출이 잘 안 나오겠죠. 근데 저는 말에 힘이 있는 사람이 되고 싶어요.

대표 바뀐 지가 언젠데 우리 급여테이블도 아직 안정해졌고, 일 못하고 열심히 안 한다며 우리가 맞는 말로 건의를 해도 아무 힘도 없잖아요. 나는 이번달 내 목표치 찍을 거예요. 선생님도 나랑 같이 열심히 해서 말에 힘이 있는 사람이 되자 우리."


그동안 그녀에게 상처받은 부분도 있었지만, 작고 어린 그녀가 정말 내 바람처럼 마음을 고쳐먹고 같이 열심히 하기를 바랐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녀는 내가 관리자가 되고 이틀만에 직접 그녀를 혼내고 내보내게 될 때까지도 변화된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이 직장에서는 한 번도 내 냉정한 얼굴을 보인 적 없었기 때문에 그녀를 포함한 모두가 당황했고, 나는 선택을 돌이킬 생각이 없었다. 정말 많은 기회를 주었지만, 내 진심 어린 부탁까지 무시하고 본인의 짧은 생각을 믿은 건 전적으로 그녀의 선택이었기 때문이다.


이 상황을 지켜보던 주변 동료들의 반응은 전혀 예상하지 못한 방향이었다. 꽤 많은 사람들은 그녀가 안쓰럽다는 반응을 했다.

주로 그녀 또래의 그녀와 성향이 비슷한 직원들의 의견이었지만, 나는 다소 큰 충격을 받았다.

그렇게 모든 과정을 다 지켜보았으면서 어떻게 그녀를 안쓰러워할 수가 있지? 내가 그동안 양보하고 피해 입은 것들은 벌써 다 잊은 건가?

그때 나는 정말 이 세상에 홀로 남은 인간이 된 기분이었다. 내 선택이 틀렸다고 생각하진 않지만, 나와 다른 사고를 하는 사람들에게 쉐도우복싱을 맞은 것 같이 아프고 속상했다.


나중에 조금 더 마음이 열리고 그들과 정이 들었을 때도 그들을 완전히 이해할 순 없었지만, 지금의 남편을 만난 것만큼이나 내 인생에 큰 배움을 얻게 된 것은 분명하다.

"세상에는 정말 다양한 사람이 있고 어떤 상황, 어떤 순간, 어떤 사람이냐에 따라 생각하는 것이 전부 다를 수 있다. 그런 개인들이 바글바글 모여서 어찌어찌 굴러가는 것이 인간 세상이다."


실제 인간 세상은 책에서만큼 룰에 의해 움직이지 않을 때가 많다. 대부분이 옳은 것을 우선으로 생각한다는 것 또한 너무 이상적인 생각이었다. 더불어 이 수많은 인간들을 명확하고 큼직한 분류로 손쉽게 나누기도 쉽지 않다.

한 명 한 명이 너무나 다르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옳은 것보다 원하는 것을 선택한다. 그 원하는 것 또한 본인 기준에서는 나쁜 게 아니겠지만.


그녀 말고도 이 직장에서 내 콜드나이프에 베이는 몇 명의 사람들이 더 있었다. 그들은 대부분 외향적이고 농담을 좋아하며 인간중심적이고 관심받기를 좋아하는 성향이 많이 강한 편이었다.

신인류들 중에서도 강도가 센 편이랄까. 그들을 보고 있으면 언젠가 칼을 뽑을 것만 같아서 어떻게든 참아보려 했지만, 발작버튼에 다가가는 오른손을 왼손이 도저히 막지 못하게 되면 나는 그들을 팩트로 찔러서 눈물을 뽑아냈다.

자꾸만 내 감상은 "못 배운 것인지, 아님 멍청한 건가."와 같아서 스스로 자중해야 한다고 이 건방진 생각을 강제로 누르려 했지만, 역시 확실한 방법은 다른 곳에 있었다.

거센 바람으로 나그네의 옷을 벗기려 하면 그는 더욱 옷을 여미지만, 따뜻한 해를 비추면 자연스레 옷을 벗게 된다.


네이버 밴드를 이용해 하루에 한 개씩 글을 쓰는 글쓰기 모임에 참여하게 되었다. 허락된 인원만 볼 수 있는 공간이라 하여도 많은 사람들에게 내 글이 매일 공개되었고, 댓글을 쓸 수 있어서 서로의 감상을 주고받으며 미션을 해나가는 방식이었다.

나는 글에서도 조금 진지하고 차분한 성격이 드러나는 것 같아서 그 점을 늘 고치고 싶다고 생각했다. 나처럼 문장을 곱씹으며 깊게 이해하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너무 무거운 것보단 읽는 순간 자체를 위해 경쾌하게 속도를 즐기는 사람도 있을 테니 말이다.

같은 주제를 가지고 나는 모호하고 무겁게 풀어냈지만, 아주 소박하고 밝게 쓴 글을 발견했고 이 글을 쓴 분은 아주 멋진 사람일 거라 생각했다.

모임이 계속될수록 그녀는 매일 모든 사람의 글에 댓글을 남기고 다녔다. 처음 한 두 개는 우연인 줄 알았는데 부지런하시게도 모든 글에 댓글을 달고 있었고, 글에서는 아주 신나는 기운이 풍겨졌다.

내가 딱 어려워하는 직장에서 만난 그들 같은 느낌이랄까.

그녀를 화면 넘어서 보아서 망정이지, 실제로 만나게 된다면 조금 피곤할 것 같다는 뜻이다.

한참을 혼자 고개를 좌우로 흔들며 다른 사람들이 쓴 글(과 그녀의 댓글)을 보다가 내 최신글에 달린 그녀의 댓글을 가장 마지막에 보았을 때, 조금 놀랐었다.

우연이겠지만, 내가 참 좋아하는 문구를 예시로 들며 차분하고 깊은 마음으로 나를 응원하는 글이었다.


나는 나와 다른 성향을 가진 사람들의 몇 가지 행동만 보고 그들을 ‘얕잡아 봐도 되는 사람군'에 분류하곤 했다.

오만이었다.

겨우 그 댓글 하나로 그녀를 다시 긍정적으로 보게 되는 스스로를 보고 속으로 한 가지 다짐을 했다.


사람 싫어하는 거 죄는 아니지만, 과연 그것이 싫어할만한 이유가 맞는지는 함부로 속단하지 말자.

분명 기운이란 게 있어서 내가 그들을 싫어하면 그들에게 어떻게든 내 마음이 가닿을 테니,

더 나이가 들기 전에 다양한 사람들을 진심으로 이해하는 법을 배우자.

그리고 또 하나.

그래도 죽어도 싫으면 어쩔 수 없다. 뭘해도 싫은 사람은 분명 존재하기 때문에.

이전 06화 적은 왜 늘 가까이에 있나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