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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흰둥이 Oct 21. 2023

두 마리 토끼를 잡을 수 있다.

3. 퇴사를 위하여

새로운 집과 새로운 일에 어느 정도 적응을 마쳤던 뜨거웠던 여름, 남자친구와 그의 부모님을 모시고 나의 고향집으로 향했다. 이미 결혼을 결심한 우리는 그 만남을 상견례라고 당당하게 칭하고 싶었지만, 아빠는 일단 부모님은 어떤 분들인지 뵙는 자리일 뿐이지 아직 결혼을 허락한 것은 아니라고 단단히 못 박은 채로 만남에 응하셨다.

저 끝에 있는 바다에서 저 끝에 있는 바다로 긴 시간 이동해야 했고, 나는 긴장되는 마음에 시간이 흐르는 것도 느끼지 못했다.


우리 집은 광역시안에서도 바다와 가까운 시골 마을에 있다. 그 마을 안에서도 작은 산 깊은 곳에 전원주택을 짓고 살고 있는데, 계절이 바뀔 때마다 산은 색색별로 옷을 바꿔 입으며 아름다운 자태를 보여주는 아주 멋진 마당을 가지고 있다.

산속이지만 집 바로 앞에 작고 예쁜 컨벤션홀을 가진 음식점이 있었고, 워낙 분위기 좋기로 유명한 곳이라 식사장소를 그곳으로 예약을 해두었다.

떨리는 마음을 애써 다독이며 양가 어른들은 첫인사를 나누었고, 아빠의 어색하게 경직된 표정을 보니 오늘 큰 사달이 나는 것은 아닌지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긴 말없이 우리는 예약된 룸으로 들어가서 서로 마주 보는 자리에 앉았다.


아빠는 엉덩이를 붙인 지 1초 만에 다짜고짜 나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우리 둘째 딸이 어렸을 때부터 고생을 많이 했습니다. 당연한 말이지만, 저는 막내 애를 참 좋아합니다. 여기저기 치여서 고생하고, 아빠가 고생시켜도 그냥 네하고 참는 애입니다.

내 딸이지만 마음씨도 착하고 얼굴도 예쁘고. 애가 너무 여려서 사실은 결혼도 제가 골라서 시키고, 데릴사위를 얻어서 평생 옆에 끼고 있을라고 했습니다.

근데 이놈이 계속 튕겨져 나가더라고요. 자식은 마음처럼 안되는가 봅니다."

아빠는 첫 문장을 말할 때부터 울먹이고 있었다. 아니 어쩌면 며칠 전날 밤부터 마음속으로는 이미 눈물이 났을지도 모르겠다.


언젠가 이십 대 중반에 고향을 방문한 어느 날이 떠올랐다. 평소에 부모님 연락도 잘 안 받고, 어쩌다가 고향집에 가면 하루이틀도 있지 않고 못 올 곳 온 것 마냥 얼른 다시 떠나려고 하던 시기였다. 그때의 나는 가족들이 좀 무서웠던 것 같다.

자칫 유연해 보일 정도로 사지를 쫙 벌리고 늘어지게 늦잠을 자고 있었는데, 아빠가 슬며시 문을 열고 들어와 벽에 어깨를 기대고 서서 나를 불렀다.

그때의 아빠는 다정한 말을 잘하지 못하는 사람이었다. 감정표현이 서툰 경상도 가장의 모습 그 자체인 아빠는 애교 많은 막내딸에게만 가끔 환한 미소를 보여주는 사람이었다.

아빠는 애처로울 정도로 작은 목소리로 내게 같이 살자고 했다.

"우리 공주 교복 벗고 나서는 쭉 같이 못살았잖아. 이러다가 시집가면 앞으로 평생 일 년에 몇 번 못 보다가 아빠 죽을 텐데. 그때는 아빠가 너희 키우느라 정신이 없었어.

딱 1년 2년만 아빠랑 살면서 맛있는 것도 먹고 놀자. 일 안 해도 돼. 놀아. 아빠가 용돈 줄게. 

그러다가 정 나가고 싶으면 그때 다시 나가면 안 될까?"

목구멍에 울음이 가득 차올라서 소리를 낼 수 없었다. 듣고 있다는 신호로 작게 고개만 끄덕였고, 내 눈에는 아빠도 울고 싶은 표정이었다. 

하지만 기어코 나는 그날 오후 예약해 둔 기차를 타고 다시 내 세상으로 도망쳤다.


남자친구의 부모님은 남자친구랑 비슷한 분들이다. 우리 아빠가 나를 사랑해서 한 말에 기분이 상하실 법도 한데, 그저 이해한다고 하셨다. 나를 보면 정말 예뻐서 왜 그렇게 걱정하시는지 안다고 하셨다.

슬픔보다 기쁠 일에 더 집중하고, 자존심보다는 진실된 소통을 선택할 줄 아시는 분들이라 나를 닮아 두려움이 많은 아빠를 따뜻하게 설득하셨다. 

식사 후 차를 마시러 집으로 와서도 참 많은 대화를 나눴다. 결국 아빠는 그래 한번 진행해 보자고 말하셨고, 그날은 마침표를 찍을 때에서야 상견례를 한 날로 마무리될 수 있었다.

우리 집 마당에 서서 푸르른 산을 바라보며 참 아름답다고 말하시던 양가 부모님들의 뒷모습이 생각난다. 가슴 벅찬 순간이었다.


그날부터 결혼식에 대한 준비는 막아둔 봇물 터지듯이 시작부터 전속력으로 진행되었다.

결혼 준비를 하면서 많은 이들이 싸운다고 하는데, 우리는 거의 싸우지 않았다. 딱 한번 신혼여행 예약건으로 잠깐 기분이 상하긴 했지만 몇 분만에 서로 오해를 풀고 다시 웃으며 다음을 진행했다. 이 가파른 인생 오르막길의 난이도에 비하면 우리에게 결혼 준비는 아주 달콤한 휴식으로 느껴졌으니까.


나는 결혼식을 생략하거나 식구들끼리 소박한 식사자리를 하는 정도로 식을 치르고 싶었지만, 남자친구의 부모님과 장남인 그는 그래도 남들 하는 수준의 결혼식을 하기를 원했다. 이렇게 덩치가 큰 문제 앞에서는 오히려 생각을 심플하게 해야 한다. 그럼 그냥 그렇게 하면 되는 것이다.

식장이나 신혼여행 또한 마음에 드는 곳이 보이면 큰 고민 없이 바로바로 예약을 했다. 나는 호텔식 웨딩보다는 풀잎과 꽃이 많은 요정의 숲 같은 분위기가 좋았고 오히려 독특한 취향 덕분에 그리 여러 후보를 고민할 필요가 없었다.

이상하게도 나는 고등학생 때 웨딩잡지를 모을 정도로 웨딩드레스를 좋아했다. 결혼이 하고 싶은 게 아니라 웨딩드레스 자체를 좋아했던 덕후였기 때문에 드레스만은 완벽하게 내가 원하는 스타일로 고르고 싶었다.

이미 예식장 패키지로 모든 것을 진행하기로 해서 예식장에 딸린 샵에 가서 몇 벌 입어보았고, 나는 딱 세 벌째 입었을 때 "첫 번째 드레스로 할게요."라고 더 입어보기를 사양했다.

첫 번째 드레스가 가장 내 스타일이기도 했고, 무얼 입든 더 중요한 건 그날 내가 정말 행복하다면 분명 그 아우라가 풍겨져 나올 거라고 생각했다.

남자친구 입장에서는 이 얼마나 성격 좋은 예비신부인가! 우리는 밖에 나가서 세상과 씨름을 하다 돌아오면, 결혼 준비로 위안을 받으며 하루하루를 보냈다.


오히려 골치 아픈 상황은 각자의 직장이었다.

그는 정육 기술을 배우기 위해 정육점에서 일하고 있었다. 그의 직장은 남성들만 있기 때문에 자칫 잘못하면 크게 혼이 나기 일쑤였고, 매 명절이 지나면 한 가게를 책임지는 팀장들은 졸업의 형태로 본인의 가게를 차려서 나가기 때문에 언제든 그 자리를 이어받을 준비가 되어 있어야 했다.

내 상황 또한 말만 팀장이지 매니저급의 자리가 공석이었는데, 대표는 계속해서 나를 주시하고 있었다. 규모가 큰 조직형태의 직장이 아니었기 때문에 급여협상도 제대로 되지 않았고, 그 자리는 온갖 일은 도맡아 하면서 매출도 이끌고 직원까지 관리해야 하는 중대한 자리여서 나는 계속해서 거절을 해오고 있었다.

항상 퇴사를 떠올리게 하는 이곳에서 더 높은 자리에 대한 욕심은 결코 없었고, 오히려 하루하루를 버티는 중인 내게는 전혀 매력적이지 않은 제안이었기 때문이었다.


관리자로써 선임 여직원을 컨트롤할 자신이 없었고, 나는 플레이어로서의 자리가 내게 맞다고 생각했지만 팀 매출로 계산되는 인센을 언제까지고 그녀에게 양보해 줄 순 없는 노릇이긴 했다.

대표는 그동안 지켜보았던 나를 믿는다며, 한 번만 용기 내주길 부탁했고 내가 그 청을 끝내 거절한다고 해서 내 상황이 나아지지 않는다는 것을 차츰 인정하기 시작했다.


명절이 지나고 얼마 후, 결혼식이 얼마 남지 않은 시점에 우리는 거의 동시에 팀장으로 승진하게 되었다.

결혼이 코앞인데, 관리자가 된 상황이 우리 둘에게는 그다지 좋은 상황은 아니었지만, 열심히 일한 시간을 인정받은 것 같아서 내심 뿌듯하기도 하고 둘이 느끼는 위치적인 고충도 비슷했기 때문에 때론 친구처럼 서로의 바깥일을 공감하고 위로할 수 있는 장점도 있었다.


결혼 말고, 결혼식 준비에 대한 내 소감은 한 문장으로 정리할 수 있다. 절대 두 번 할 짓은 못된다.

신경 써야 할 것들이 너무나 많았고, 극강의 집순이인 나는 내 청첩장을 주는 자리인데도 시간을 빼서 누군가를 만나는 것이 너무나 힘들었다. 나는 직장동료들을 제외하고 딱 두 팀을 단 하루 만에 클리어한 것 빼고는 그 누구도 만나지 않았다.

더 정확하게는 만날 시간이 없었다. 인력 부족으로 주말 근무도 자주 해야 했고, 매출의 대부분을 담당하던 내가 결혼과 신혼여행으로 자리를 오래 비워야 했기 때문에, 그전에 많은 일을 해두어야 했다.

 

동료들은 결혼식 전날까지 지쳐서 일하는 나를 안쓰러워했다. 그쯤 되자 나는 이제 피부관리고 뭐고 모르겠고 그저 빨리 결혼식을 끝내고 싶다는 생각만 가득한 상태였다.

그때 저녁시간에만 잠깐 아르바이트를 하러 오는 어리고 예쁜 선생님이 나를 콕콕 찔러 부르더니, 발그레 설레는 얼굴로 자신의 핸드폰 화면을 보여주었다.

화면에 보이는 것은 여성옷 쇼핑몰의 상세페이지였는데, 단아하고 예쁜 원피스였다.

"팀장님. 저 결혼식 초대 처음 받아봐요. 너무 두근대요. 이렇게 입고 가도 되죠? 팀장님 결혼식에서 입으려고 주문했어요!"

이 귀엽고 사랑스러운 소녀는 오늘 잠을 푹 자야 한다며 대표님께 나를 일찍 퇴근시켜 달라고 본인이 말하겠다며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맞아. 나 내일 결혼하지. 누군가의 따뜻한 마음에 나는 예비신부의 두근거림을 되찾았다.

퇴근 시간이 되어 문을 나서긴 전에 "내일 뵙겠습니다." 인사를 하자, 다들 포근한 미소로 손을 흔들며 나를 배웅해 주었다.

몇몇은 농담 삼아 "늦잠 자다가 내일 지각하면 안되요!", "팀장님 시집가는 날~." 나를 웃기며 본인들이 더 환하게 웃어주었다.

센터를 빠져나와 어느새 봄기운이 가득한 복작복작한 거리로 발을 옮기며, 열정 가득한 초보 팀장의 명찰을 떼고 내일 사랑의 서약을 읊을 한 남자의 예비신부로 마음가짐이 서서히 바뀌었다.


집에 도착해서 간편한 옷으로 갈아입고 그와 결혼을 하기로 이야기 한 날을 상기시켜 보았다.

동거만 하고 끝내기 위해 이 험난한 여정을 시작한 게 절대 아니었지만, 그도 나도 쉽사리 결혼을 하자는 직접적인 말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때의 나는 사건의 피해자이지만 먹고살기 위해 또 다른 세상에 몸을 던져야 했고, 그는 가진 게 많이 없어서 아픈 나를 오로지 책임지겠다고 당당하게 청혼하지 못하고 있었다.


결국 내가 먼저 그에게 말을 꺼냈다.

"나 결혼은 부모님의 허락을 받고 나서 하고 싶어. 최대한 부모님께 손 벌리지 않고, 우리 주변 사람들이 어떠한 걱정과 부담도 없이 오로지 축복할 수 있을 때에 결혼하고 싶어. 무슨 말인지 알지?"

그는 내 말을 듣고 조금은 풀이 죽은 표정이었다. 완벽주의 여자친구의 성향을 알고 있으니, 아마 최대한 미루자는 뜻으로 받아들였을 것이다.

"그러니까 지금부터 돈 모으자. 그리고 올해 가을이나 내년 봄에 결혼하자. 나 믿지? 나는 지는 싸움은 안 해. 우린 아주 잘 해낼 거야. 우리 결혼하자."

그와 처음 만났을 때의 나의 모습은 거의 없었다. 이제는 내가 그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이렇게 힘든 시간을 보내며 고생만 나누다가 헤어지고 싶지 않았고, 내가 그의 품 안에서 따뜻하게 클 수 있었던 만큼 그에게 갚으며 살고 싶어졌다.


그리고 결혼식 전날 밤 예비부부는 메밀국수와 곁들여 먹을 두 가지 맛 전병까지 시켜서 배가 터지게 나눠먹었다. 우리는 신명 나게 잘 먹는 서로를 칭찬해 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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