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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흰둥이 Nov 30. 2023

침묵의 007 빵

3. 일을 위하여

그녀를 처음 보았을 때 외국 모델 같다는 생각을 했다. 훤칠한 키에 단아하지만 이국적인 외모, 맵시와 센스를 다잡은 옷차림에 드라마에 나오는 커리어우먼 여주인공이 현실세계로 뛰쳐나온 모습이었다.

면접장에 들어서서 마주한 얼굴은 세 명. 팀장 두 명과 인사차장 한 명이었다.

인사차장이라고 자신을 소개하던 모델 같은 여성은 차분하고 따뜻한 눈으로 나에게 지원동기를 물어보았다.

처음 사회생활을 시작했던 작은 회사는 말도 안 되게 많은 업무를 떠맡아야 했다. 그래서 비교적 쉬운 일을 하고 싶었다는 속마음을 숨긴 채 대단한 포부를 뭉개 뭉개 피워서 그들 앞에 꾸며냈었다.


면접을 마치고 돌아가는 길을 안내해 주겠다며 따라 나온 인사차장님은 나에게 보기 좋았다며 응원한다고 말해주었다. 누구에게나 해주는 인사인지 분간할 순 없었지만, 진심이 느껴졌기에 떨렸던 마음에 포근한 토닥임을 느꼈다.

굴지의 대기업 면접에 참여할 수 있었다는 것만으로도 잘 해냈다고 생각했는데 그로부터 며칠도 되지 않아 합격 소식을 듣게 되었고, 방방 뛰며 기뻐서 곧장 출근을 하기로 했다.


차장님은 때때로 나른한 오후에 차 한잔하자며 나를 불러냈고, 볕이 좋은 조용한 공간에 앉아 30분 남짓 작은 스몰 토크를 나눴다.

최근에는 취미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며 자신이 그린 그림을 보여주기도 하고 나에 관한 얕은 질문을 하기도 했다. 그녀의 늘어뜨리는 말투와 차분한 목소리는 나를 긴장시키면서도 따뜻하게 만들어서 우리는 작은 새들처럼 소곤소곤 조잘거렸다.

저렇게 멋있는 사람과 동료일 수 있다는 사실은 새로운 직장생활에 더욱 행복감을 보태주었다.



하지만 철이 없던 나는 얼마 못 가 여유 있는 업무 강도에 슬슬 지루함을 느끼기 시작했다.

건방진 생각으로 일을 미뤘다가 처리하거나 내 실수가 드러났을 때는 오히려 회사나 주변 동료의 허점을 앞세워 두며 마음의 방패로 삼아댔다.

그렇게 아슬아슬하게 일을 해도 아무도 내게 직접적으로 화를 내지 않았기 때문에 눈 가리고 아웅 하는 꼴이 잘 숨겨지고 있다고 단단히 착각하게 되었다.

말을 해줬으면 고쳤을 텐데, 아무 말도 안 해주고 내가 일을 망칠 때까지 두었다가 골탕을 먹이는 것은 아닌지 오히려 그들에게 화살을 돌리며 혼자 성질이 나기도 했다.


어린 어리석음은 특히 힘이 강하다. 달려 나가는 속도도 빨라서 무엇이든 빨리 파탄을 낸다.

하지만 또 이르게 다시 일어서라고. 그렇게 서두르고 힘이 넘치는 것이 아닐까.


날씨도 좋았던 어느 월요일에 나는 점심이 돼서야 눈을 떠버렸다. 원인 없이 순수한 늦잠이었다.

부재중 몇 통만이 남아있는 핸드폰을 보며 이번에도 잘 넘길 수 있을 거라는 미련함을 쥐고 허가 없는 오후 출근을 했다.

차장님이 나를 작은 회의실로 불러냈다. 차 한잔도 앞에 두지 않고 굳은 얼굴로 쳐다보며 무슨 일이 있는지 내게 물어봤다.

나는 안개처럼 시야를 흐릴 뿐인 엉성한 말들만 늘어뜨려놓고 정작 그녀가 원하는 대답을 하지 못했다.

정확한 사정이 있다면 말해주면 된다고 타이르던 차장님은 나의 못된 어리석음을 듣고는 그저 알겠다는 말만 하고는 자리를 털고 사무실로 돌아갔다.

뒤늦게 견딜 수 없이 수치스러워진 나는 그 길로 사표를 내고, 황금 같던 직장을 그만두었다.


그녀가 티타임을 통해 간접적으로 나를 관리해 왔다는 사실은 시간이 많이 흐르고 내가 관리직이 되었을 때쯤에야 이해할 수 있었다. 그녀 또한 버티며 일하는 중임에도 나름 최선을 다해 나를 끌어주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나는 오래도록 깊은 생각에 잠겨야 했다.



내가 면접관으로 참여하여 채용한 직원들이 회사에 적응해 나가는 과정에서 나는 굉장히 큰 책임감을 느꼈다. 분명 나의 의견으로 그 사람을 선택한 것이기 때문에 특히 더 좋은 직원이 되기를 바랐다.

그래서 더욱 관심을 가지고 내가 해줄 수 있는 선에서 최대한 그 이의 성장을 끌어내려고 애를 썼고, 부족한 부분은 내가 손을 보태어 주려고 노력했다.


사회에 나온 지 어느 정도 된 나는 어리석은데 고집이 센 사람을 좋아하지 않게 되었다.

두루두루 사람 좋아하는 한 직원은 동료들과 사이좋게 지내는 것 말고는 제대로 할 줄 아는 게 없었다. 자신 앞에 놓인 몫을 똑바로 처리하지 못하니 다른 사람들이 그 몫을 나눠 감당해야 했고, 틀리는 업무를 여러 번 알려주었지만 크게 중요하다고 생각하지 못하는 눈치였다.

자신의 무기가 서글서글한 성격과 서비스능력이니 그 외의 요소에 대해서는 못하기도 하고 안 하기도 하는 것이다.

어느 순간부터는 틀린 업무를 수정해야 하는 상황 외에는 아무도 그녀에게 일적으로 조언을 하거나 지적하지 않았다.

침묵의 007 빵이 시작된 것이다.

마지막 빵! 을 맞았다고 그 사람의 자리가 회사에서 당장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대부분의 경우는 여전히 다른 이들이 몫을 나누며 버텨야 하지만, 분명 소리 없이 매듭지어진 무언가는 있다.


나는 회사에서 할 수 있는 가장 큰 복수가 무엇인지 안다. 바로 업무배제이다.

당장은 또 혼나야 하는 어려운 일을 안 해도 되니까 신이 난 얼굴이 된다. 다른 사정이 생기지 않는 한 한동안은 그 직장을 편한 마음으로 다닐 여유도 생긴다.

하지만 반대로 내 입장에서는 그런 이들을 보며 조용히 혀를 찰뿐이다.

업무배제란 것은 그 사람의 쓸모를 없애는 것이다. 그 사람이 회사에 있어야 할 이유가 줄어든다는 뜻이다.

이곳은 가정도 학교도 아니라서 몇 차례 권유하고 교육해도 알아듣지 못하면, 그 자리를 그 사람에게 맡겨두는 게 모두를 힘들게 하는 것이고, 그 당사자에게도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안타깝지만 자신에게 맞는 일을 찾아서 성장하는 게 맞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나는 그이가 해내지 못하는 업무를 내가 가져오는 방향으로 향한다.

내가 일을 다 떠안는 꼴과 비슷해지니 미련하고 힘들게만 보이겠지만, 실상은 모르는 말씀이다.


떠안게 된 일도 잘 해내게 되면 결국 나는 대체될 수 없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능력이 가난한 누군가와 달리 몇 명의 몫을 할 수 있는 나 한 사람에게 회사는 자유와 관용을 베풀기 시작한다.

많은 것을 컨트롤하게 되면 발언에 힘이 생긴다. 컨트롤키를 쥐고 쉬운 업무부터 다시 배분하여 나를 중심으로 업무 라인을 효율적으로 짤 수 있게 된다면 가장 좋은 결과일 것이다.

심지어는 이직도 쉬워진다. 업무를 수행하는 것과 업무 시스템을 만들 줄 아는 것은 천지 차이이기 때문이다.


나는 이후로도 그녀의 어설픈 핑계를 들을 때마다 그저 알겠다고 대답했고, 모두가 참여했던 침묵의 007 빵이 이미 끝났다는 것을 그녀만 모르고 일이 흘러갔다.


하루는 그녀가 나에게 말했다.

"팀장님은 대단한 것 같아요. 저는 그렇게 못하겠어요. 자존심 상하기도 하고, 의지가 안 생기기도 하고."

말도 안 되는 요구를 하는 vip고객에게 웃으며 고개 숙여 거절하고, 대표에게도 한 번만 도와주십시오 고개를 숙이며 인계한 후 자리로 돌아와서 앉았을 때였다. 그다지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그녀는 이제 주 업무가 비품배치와 청소였기 때문에 내가 고객과 말씨름을 하는 동안 비품의 각도나 요리조리 옮겨가며 구경만 하고 있었다.


"저한테 고개를 숙이는 일은 아무것도 아니에요. 내가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한 마땅한 태도일 뿐이라서요. 흔한 말이지만, 무엇이든 절실하지 않으면 이런 사소한 것들이 모두 장애물일 뿐이더라고요. 일하러 왔으니까, 일을 잘하기 위한 수단들만 있으면 되죠."


무심한 투로 말했지만, 깊은 진심이었다.

누군가에게 고개를 숙이거나 배우려 드는 마음은 결코 어려운 것이 아니다.

어렸을 적 이력서에 허구처럼 부풀려서 썼던 노력하겠다는 말들이 지금은 진실이 되었다.

절실함이란 반복해서 극복할수록 뚜렷해지는 결과물이다.

조직마다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사회적인 대우를 받고 있으니 눈치채지 못할 수 있다. 자신이 도태되고 있지는 않은지 자꾸만 들여다봐야 한다.

목표는 항상 대체될 수 없는 사람이어야 한다. 그래야 나 한 사람 몫을 제대로 할 수 있다.


차장님은 내가 퇴사를 결정했을 때 무어라 응원도 질책도 하지 않았다.

그 어떤 말을 해주어도 여물지 못한 나는 알아듣지 못할 것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맞았다. 나는 그저 부끄러움과 핑곗거리만이 머릿속에 가득했었다.

좋은 직장을 도망쳐 나와서는 좀 더 나를 단련시켜야 하는 곳으로 흘러가게 되었다.

그것은 결과적으로 회사에게도 나에게도 잘된 일이었다. 자신의 쓸모를 증명해 낼 줄 알아야 비로소 회사가 필요로 하는 일원이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

일로 만난 사이에서 소리 없는 응원과 아무 말도 해주지 않는 것 이 두 가지 모두가 얼마나 많은 노고가 필요한 일인지 지금의 나는 알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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