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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흰둥이 Nov 21. 2023

나의 반려견 이야기

2. 적을 위하여

나는 동물을 사랑하는 편이고 반려동물을 ‘가족’의 개념 안에 두는 사람이다.

할 수 있는 선에서 보호가 필요한 동물들을 도우려 하고, 특히 개에 대해서는 무한한 애정을 가지고 있다고 자부한다.

그래서 떠나버린 반려견은 나를 참을 수 없이 슬프고 아프게 만들기에 충분한 존재가 된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내가 완두를 얼마나 사랑했는지를 깨달은 건 그 아이가 떠나버린 후였다.

나에게 완두는 생각만 해도 반사적으로 눈물이 고이게 하는 특정한 자극으로 남은 셈이다.


나는 항상 어리숙하고 어딘가 부족하지만 진심을 순수하게 표현할 줄 아는 이에게 끌려버린다. 모순된 기준이라는 걸 스스로 알지만 원래 이상형이란 건 모든 욕구의 모호한 집합체니까.

그런 면에서 완두는 완벽하게 내 마음을 훔친 아이다.

내가 대학을 다니던 때 고향집 마당에서 태어난 완두는 삼 형제 중 막내였다. 뽀얀 형제들과 다르게 혼자만 갈색털에 몸집이 작아서 안쓰럽다는 생각을 가장 먼저 했던 것 같다.


선천적으로 장애를 가지고 태어나서 형제들에게 따돌림을 당했고, 커서는 윤기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거친 털과 노총각냄새가 날 거 같은 외모에, 성격은 또 어찌나 겁이 많은지 그 아이에겐 미안하지만 ‘찌질하다’는 말밖에 완벽한 표현이 없을 정도다.

하지만 난 그 못생기고 작은 짝짝이 눈이 좋았고, 볼품없이 마른 다리 밑으로 양말을 신은 듯 한 하얀 네 발이 좋았다. 막내아들이라고 불리는 걸 알아듣는지 여기저기를 만져주면 계속해서 손길을 원하는 그 애교스러움도 좋았고, 눈두덩이와 얼굴을 쓰다듬고 있자면 가만히 앉아 지긋이 나를 바라보는 애처로운 그 눈빛이 정말 지독하게 좋았다. 

어느 날 마당에 벌러덩 누워서 따사로운 볕을 이불 삼아 낮잠을 자는 때이면 불편해서 금세 자리를 뜰 법도 한데, 얌전히 안겨서 같이 코를 골며 달콤한 꿈을 꾸던 로맨틱한 녀석이었다.

     

나는 좋아하는 어느 영화에 나온 대사 몇 줄이 늘 마음 한 구석에서 부대꼈다.

“사랑을 다 써버려서 더 이상 남아있지 않다. 그래서 당신에게 주고 싶은데 줄 수 있는 사랑이 내게는 없다.”

완두를 잃고, 새로운 강아지가 들어오게 되고서야 그 말이 온전히 가슴으로 스며들어왔다.

완두의 집이 있던 곳에 새로운 아이의 집이 생겼고 그 아이의 식사와 건강을 걱정하게 되었다. 어느새 새로운 아이와 함께 한 시간이 해를 지나 완두 때처럼 성장해 가는 모습을 꽤 지켜보게도 되었다. 

독림을 하고 난 후라, 가끔 마주하는 사이여서 그런지 몰라도 분명 어여삐 여기고 있는데 마음 편히 사랑할 수는 없었다. 

마치 고장 난 것처럼 마음이 굳어져있다는 걸 스스로만 눈치채고 있었다. 


완두를 잃고 몇 년 동안은 고향집에 간 날 밤이 되면 조그만 소리에도 창문을 열고 ‘나의 완두가 돌아온 건 아닐까’ 한참을 어둠 속을 헤집었었다. 동네를 다니다 비슷하게 생긴 녀석이 보이면 쫓아가 얼굴을 확인하고야 마는 스스로가 우스울 때도 있었다. 

'완두가 아니야. 우리 완두는 저렇게 잘생기지 않았어.'라며 손을 탁 털고 미련 없이 뒤도는 척하는 마음속으로는 ‘제발. 제발. 제발..’ 기약 없는 그 아이의 안녕을 빌고 빌었다.


갈수록 활발해지던 완두는 마당을 뛰쳐나가는 날이 잦아지더니 기어코 영영 돌아오지 않았다. 

아주 긴 시간이 지나고 최근에서야 아빠는 처음으로 완두 이야기를 먼저 꺼냈다. 아빠는 하루 중에 완두와 산책하는 시간을 가장 좋아했었다.

절대 우리 가족을 벗어나지 않던 호위무사 같던 녀석이 자꾸만 멀리멀리 떠나려고 했을 때 아빠는 어떻게든 이별을 막아보려 했지만, 녀석이 아빠의 붙잡음을 강하게 밀어내고 단 한 번 아빠를 빤히 보고는 뛰어가버린 순간은 마치 눈으로 작별인사를 하는 것 같았다고 말했다.

얼마 못 살 녀석이 우리 가족을 만나서 나이가 들도록 오래 살았던 거라고. 완두는 평온하게 갔을 거라고 말하며 아빠는 몇 초간 아무 말하지 않고 손을 꼼지락거렸다.

 

처음 너를 만나고 선천적 장애로 인해 몇 개월 살지 못한다는 말을 들은 순간부터 네가 죽을 때까지 지켜주기로 몇 번이고 약속했는데, 이별의 순간이 오면 품 안에서 따뜻하게 “안녕. 잘 가.” 인사해 주면서 보내 주리라 다짐했는데 겨우 그 거 하나 못 지켜 준 게 많이 미안한가 보다.     

나에게 완두는 단 한 번의 영원을 다짐한 마음이었고, 다시는 못 낼 용기가 되었다.

가장 가슴으로 사랑한 대상이었고 오래도록 나에게 특별한 자극으로 남았다.



몇 년 전 일이다. 큰 결심을 하고 유기견 보호소를 방문했다.

완두와의 이별 이후, 많은 시간이 흘렀고 오래도록 관심도 없던 일이 슬쩍 물 위로 올라왔다. 

새로운 반려견을 만나보면 어떨까 하는 가벼운 설렘이었다. 이왕이면 연의 소중함을 아는 녀석들 중에서 말이다. 

깨끗해 보이는 외관은 마치 애견카페 같았다. 내가 상상한 것 이상으로 달콤하고 쾌적해 보이는 외관에 이곳에 있는 유기견들의 견생은 생각보다 괜찮을지도 모른다는 간편한 생각을 하며 문을 열었고, 단번에 몸을 흠칫 떨며 경직되었다.


열 평 남짓한 곳에 바글바글 정신없이 짖는 아이들. 냄새나고 시끄럽고 이건 절대 '집'의 모습이 아니었다.

어렵사리 진입하여 구석자리에 앉자마자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다가오는 몇 아이들은 내 다리를 베고 눕고, 와락 안겨서 가만히 기대어 있기도 했다. 겨우 몇 번의 손길에 몸을 떨며 좋아하는 아이들. 

그리고 한 발치 앞까지 와놓고도 더 이상 다가오지 못하고 우뚝 앉아서 왜 온 건지 궁금한 눈으로 지켜보는 게 대부분. 눈은 그렁그렁한데 이도저도 못하는 꼴이 마치 내 모습을 보는듯해 쓴웃음이 나왔다.

저 멀리서 나오지도 않고, 내 존재자체가 불편하다는 기운을 뿜어내는 아이들도 있었다. 원망이 가득 찬 눈으로 나를 흘겨보고 있었다. 


완두에게 그랬듯이 천천히 눈두덩이를 쓰다듬으며 한 아이의 눈을 바라봤다.

하얀 털의 커다란 녀석은 아이 같은 순수함이 얼굴 가득했다.

‘너는 마당 있는 집이 아니면 못 가겠구나. 아직 아이일 뿐인데.’     


근데 어쩜 이렇게들 예쁠까. 

눈동자가 별 같았다. 앉아서 내려다보는 광경은 별빛으로 가득 차서 이 협소한 곳이 마치 수많은 별들이 깔린 낮은 곳의 밤하늘 같았다.


치열한 생을 견학하러 온 철없는 인간.

너희는 어떤 마음을 품고 이곳에서 이리저리 몸을 치여 가며 살아가고 있을까.

다시 데리러 올 거라 믿는 걸까. 다신 그 공장으로 가고 싶지 않아서 버티는 걸까.     

‘근데 왜 이렇게 예쁜 눈으로 나를 받아주는 거야.’ 쓸모없는 죄책감에 몸서리치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그저 마음 맞는 가족이랑 따뜻한 집에서 같이 밥 먹고 서로 위로하며 살아가고 싶을 뿐인데

케이지 몇 개 들어가는 작은 전시관에서 하루에도 수십 번 가벼운 안녕을 물으러 오는 못난 사람들에게 지치지도 않고 마음을 열고 있었다.

      

나를 닮은 수많은 별들을 뒤로하고 도망쳐 나온 길에서 하늘이 금방이라도 무너질 것 같았다.

길을 나선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산책 나온 강아지와 사람들이 보였다.     

부러웠다. 미웠다. 울 것 같아서 인상을 쓰고 빠르게 누군가의 행복들을 지나쳐 걸어갔다.

마치 모두가 달려 나갈 때 케이지 안에 숨어서 화를 내던 아이들 중 하나가 된 기분이었다.

내 마음을 나도 정확히 알 순 없었지만, 아직 가족을 맞이할 준비가 되지 않았다는 것은 확실히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시간이 많이 지나서 요새는 지나가는 강아지만 봐도 예쁘고, sns 속에 귀여운 녀석들을 보고 혼자서 오두방정을 떨며 가슴을 부여잡는다.

시간이란 결국 모든 것을 흐리게 하고 다시 태어나게 해서 전처럼 울고 싶다든가 속상하지만은 않아 졌다.

좋은 연이 있다면 함께 할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고, 행복해 보이는 강아지가 세상에 많다는 사실은 내가 한 것도 없이 따뜻함을 느끼게 한다.

시간에 기대어 보낸 시간이었지만, 드문드문 떠오르는 완두도 별빛 같은 눈동자들도 내게 좀 더 좋은 방향의 사랑을 깨우치게 했다.

잘 접어서 가려두어야 할 감정이 있고, 반드시 휘발되어서 새로운 연을 위해 자리를 내어주어야 할 감정도 있다. 

사람은 마음을 내어주며 살아야 하니까 결국 보내주어야 한다.


이따금 완두의 사진을 꺼내어 보면 히죽 웃고 있는 표정이 참 개구져서 푸르르 웃음이 나온다.

분명 녀석도 내가 더 행복하기를 바랐을 것이다. 누군가가 보기엔 우스운 말일 수 있겠지만, 진정한 사랑을 해본 사람이라면 알 수 있다. 

반려견은 정말 반려인이 행복하기만 바랄 뿐 그 무엇도 우리에게 요구하지 않는다는 것을.

나는 행복이란 약간의 눈물을 훔쳐야 얻을 수 있는 흔한 보물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의미에서 행복을 생명으로 만들어낸 존재가 바로 반려견이지 않을까.

나의 반려견을 그럼에도 내고 싶은 용기이자 행복으로 남기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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