견디기 좋은 계절

여름

by 빈부분

나는 여름이 좋다. 내가 좋아하는 여름의 사소한 감각들을 나열해 보자면 다음과 같다.


설레는 일들은 늘 겨울 방학보다 여름 방학 때 자주 일어났고 밤보다 낮이 길어 스물네 시간으로 똑같은 하루에도 더 오랜 시간을 바깥에서 보낼 수 있었다. 짧지 않은 아침과 저녁의 긴 빛을 즐길 수 있는 것은 생각보다 커다란 즐거움이었다. 대충 슬리퍼를 끌고 나간 산책길에서 가볍고 넉넉한 티셔츠 한 장과 살갗 사이로 지나가는 바람을 느끼던 것도, 진한 색으로 단단하게 영그는 것들의 힘, 맨발로 밟는 투명하고 뜨거운 모래 알갱이 같은 것들도 모두 여름 안에 있었다.


그렇게 생각하니 여름은 오감의 계절이다. 우리는 계곡이나 바다에 온 몸을 던져 피부의 솜털 사이사이까지 흠뻑 적신다. 햇빛에 몸이 달아오르면 송골송골 땀이 솟아오른다. 비가 오면 공기가 찰싹 붙어 따라다니고 흘러내린 땀방울과 섞여 더 자주 몸을 씻는다. 흰 햇빛에 눈살을 찌푸리고 시린 해변을 걷는다. 뜨거움을 머금고 자란 풋풋하고 단 과일과 찬 맥주를 마신다. 비 비린내, 바다와 모래의 짠 냄새, 물기 어린 풀의 향긋함을 느낀다. 모래사장 위에서 해를 쬐고 녹초가 되어 방으로 돌아가 낮잠을 잔다. 여름은 온몸으로 나는 계절이다.


여름에는 몸이 흐물흐물해지면서 어디든 잘 드러눕게 된다. 나는 부여 집에선 작은 마루 한편에, 대전 집에 가서는 창문 앞 방바닥에, 서울 자취방에선 빵빵하게 틀어 놓은 에어컨 아래에 곧잘 눕는다. 어스름이 깔리는 시간에는 한강 잔디밭이나 나무 아래에 누워도 좋다. 녹진해진 몸을 널브러뜨리고 힘을 빼면 오 분 안짝으로 달아오른 몸이 식으면서 상쾌한 기분이 된다. 아무래도 겨울에 그렇게 누워 있자면 너무 추울 거다. 여름의 한복판에 누워 있자면 가만히 있어도 주변 풍경들이 슬금슬금 다가온다. 맨살에 닿은 반들반들한 바닥의 재질, 선풍기의 바람이 흔드는 머리카락, 어떻게든 피를 마시려는 모기들과 아파트 단지 안에 있는 분수에서 뛰어노는 아이들, 커다란 나무들의 존재감과 매미가 우는 소리들이 그렇다.


여름은 견디기 좋은 계절이다. 잘금잘금 오래도록 내리는 비에 올라가는 습도나 작열하는 태양 아래 뜨거워지는 정수리에 지쳐 아무것도 하지 못하게 되어버리는 순간들을 견딘다. 그렇게 견뎌 내야 하는 시간이 길어지면 우리는 더운 여름을 원망하며 그저 지나가기만을 바란다. 그러나 축축하게 비 내리는 새벽이 없었더라면 이른 아침 눈을 떴을 때 완만한 봉우리 사이에 낀 엷고 흐린 구름들이 주는 편안함을 몰랐을 테고, 지칠 만큼의 햇빛이 없었더라면 포도와 쌀알이 그만큼 통통해지지 못했을 테다.



회사를 다니기 시작하고 나서부터는 여름이 여름 같지 않다. 건물 안은 '덥지 않음’의 상태보다 늘 더 추워서 나를 비롯한 몇몇 사람들은 늘 얇은 패딩이나 가디건을 걸치고 일을 한다. 올해도 이렇게 여름이 온 줄 모르고 여름을 난다. 여름에도 여름이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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