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
여름을 떠올리면 언제나 머릿속에 끝도 없는 푸른 물결이 넘실거린다. 흔들리는 그 물결의 정체는 내가 겪어온 여름의 기억들. 여름에 나는 제주도 함덕 해수욕장의 하얀 파도를 챱챱챱 밟으며 뛰기도 하고, 까마득한 다이빙대에 올라 블루 라군에 냅다 몸을 던지기도 하고, 오키나와의 푸른 바닷속을 방문하기도 했다가, 하와이 와이키키 바다에 발을 담그고 붉게 타오르는 노을을 맞기도 한다. 동강과 한탄강의 물살에서 래프팅을 하기도 하고, 장마가 지나고 다시 맑아진 한강에서 수상스키를 타곤 했고 또 아주 여러 날들을 야외 수영장에서 보냈다. 나에게 여름은 언제나 바다였고, 계곡이었고, 또 수영장이었다. 여름의 나는 물속에 있는 것이 옳은 일인 양 느껴졌다.
차가운 물에 망설임 없이 내 몸을 내던지는 것이 나에게 가장 강렬한 여름의 기억이기 때문이었을까. 그래서인지 매해 여름의 기억은 뜨겁고도 차갑다. 머리 위에서 작열하는 뜨거운 햇살과 후끈 달아오라 피부를 감싸는 끈적한 공기에 숨이 턱턱 막히지만 달궈진 몸을 한순간에 식혀주는 차가운 계곡물에, 철썩하며 하얗게 부서지는 파도에 몸을 맡길 수 있어 여름을 사랑할 수밖에 없었다. 물속에서 가볍게 부유하는 몸과 내 팔다리를 스쳐 지나가는 간질간질한 물의 파동에 나도 모르게 미소를 짓고 만다. 물속에서 음악을 듣고 책을 읽을 수 있다면, 나는 여름 내내 물밖에 나갈 일이 없으리라 어느 여름날 인스타그램에 적었던 적이 있다. 나는 다만 물속에 있는 것이 좋았다.
6월의 어느 날, 1박 2일로 짧게 강릉을 방문했다. 여름이 가기 전에 유일하게 비울 수 있는 주말이었다. 빔은 1박이어도 좋으니 떠나자고 했다. 노숀이는 바다를 보고 싶다고 했다. 마음은 벌써 여름이었다.
강릉의 바다 앞에 숙소를 잡고, 돗자리와 의자를 챙겨 바다로 나섰다. 바람이 많이 불어 파도가 세차게 치던 날이었다. 빔은 모래사장 위 펼친 돗자리 위에서 책을 읽기 시작하고, 나는 신발을 얼른 벗어 재끼고 바다로 달렸다. 뒤를 돌아 노숀에게 얼른 오라고 손짓했다. 웃음이 스멀스멀 삐져나왔다. 바다였다.
우리 마음은 충분히 여름이었으나, 아직 채 여름이 오지 않았던 6월의 바다는 힘이 셌고 바람은 찼고 파도는 강했다. 깊게 들어가지 않아도 가파른 동해의 바다는 우리들보다 큰 파도를 보내왔다. 몇 번이고 다리에 힘을 주고 파도를 이겨내며 깔깔대며 웃었지만 또다시 몇 번은 파도에 휩쓸려 우리는 김밥처럼 돌돌 말려 모래사장 위로 던져졌다. 그게 뭐라고, 우린 그토록 즐거워했을까.
올여름은 이 바다가 마지막이라는 생각에, 몇 년 만에 손발이 파래지도록 바다에 머물렀다. 편의점에서 사 온 컵라면을 털썩 주저앉아 호호 불어먹었다. 물에 쫄딱 젖어 허겁지겁 젓가락질을 하는 노숀과 나를 바라보며 빔은 읽던 책을 덮고 웃었다.
그다음 날도 우리는 바다를 걸었다. 커피를 마시면서, 아이스크림을 먹으면서, 지난밤 미처 다 마시지 못한 화이트 와인을 비우면서 우린 바다를 바라봤다. 바닷속으로 들어가지는 못했지만, 실컷 눈에라도 담아 가겠다는 듯. 우리가 이토록 사랑하는 여름의 바다는 도대체 뭘까?
오늘은 비가 온다. 7월의 장마가 지나고 나면 다시금 뜨거운 여름이 올까. 어디론가 떠나지 않고, 에어컨 아래에서 보내게 될 올해의 여름을 난 온전히 기억해 낼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