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 우리 좋았잖아

버리기

by 빈부분

숩은 거울을 보며 화장을 하고 있고, 붑은 나갈 채비를 하는 숩의 근처를 얼쩡거린다. 너저분한 방.

붑 : (괜히 영수증 뭉치를 집어 들며) "이건 좀 버려야겠다."
숩 : (말없이 속눈썹을 올린다)
붑 : (방 안을 휙 둘러보다 약간 찔린 듯한 표정으로) "아무래도 나 청소 좀 해야겠지?"
숩 : (매서운 표정과 단호한 어조로) "어. 제발 좀 버려."
붑 : "으.. 응.."

엊저녁 동거인 숩과 나눈 장면이다. 최근 이런저런 이유로 숩과 방을 한동안 바꾸어서 썼는데, 깔끔하고 단정하게 정리된 그녀의 방과 대조적으로 이것저것 너저분한 나의 방에서 지내는 것이 썩 편치 못했던 모양이다. 미안한 마음이 없지 않아 생겼는데 요 며칠의 룸 체인지를 통해 (내가) 깨달은 것도 있으니, 미안하고 고맙기까지 한 거였군. 아무튼 숩의 깔끔한 방에서 지내면서 깨닫게 된 것은, 단정한 방을 만들기 위해서는 단순히 정리정돈을 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는 거다. 나도 나름의 정리정돈을 하는데 왜 나와 그녀의 방 모양새가 이렇게 다른가, 그 해답은 버리는 데에 있었다.

여행을 다녀와서 뭉탱이로 가져온 영수증 더미, 풀어헤친 택배 속 포장지, 전시 관람 티켓 뭉치, 샘플 인쇄한 사진 뭉치를 비롯한 갖가지 종이 뭉치들과 구석에 비뚜름하게 쌓인 책들(한두 장 넘겨 본), 다 마신 술병, 대충 개어 놓은 해진 바지와 구멍 난 양말 같은 것들이 버려지지 못하고 쌓여 있는 방은 아무리 정리해도 영 단정해지지 않았다.

그 사실을 머리로는 아주 잘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뭔가를 버리지 못하는 이유는 첫째, 그들이 지금은 필요하지 않지만 언젠가는 쓸 일이 있지 않을까 하는 물건들이기 때문이다. 그런 물건들은 평소에는 찾지 않지만 막상 필요할 때에는 완벽한 것이어서 꾸역꾸역 쌓아 놓은 물건이 아주아주 가끔 그렇게 빛을 발하면 역시 버리지 않길 잘했군, 하고 뿌듯해하는 것이다. 버릴 물건들을 만지다 보면 그 뿌듯함이 떠오르면서 이건 다 쓸 데가 있는데..! 하게 되는 그런 마음.

두 번째 이유는 좋은 기억이든 나쁜 기억이든 지나칠 만한 기억이든 무조건 끌어안고 있으려는 욕심 때문이다. 택을 보며 떠올릴 수 있는 첫 순간의 기쁨과 떠오르는 장면들. 사실 쓰레기들이 처음부터 쓰레기였던 것은 아니어서, 모든 쓰레기들은 쓰레기가 되기 전의 기억을 가지고 있기 마련이다. 그래서 그때 우리 좋았잖아.. 그땐 설렜잖아.. 하며 이미 지나간 시간을 놓지 못하는 미련, 놓지 못하는 성격 때문에 또 버리지 못하고 쌓아 놓는다.

아마 돈을 조금 더 벌고, 글을 쓰는 방식으로 기억을 저장해 놓는다면 조금 더 쉽게 무언가를 버릴 수 있을 것이다. 그치만 나처럼 질척이는 사람들은 버릴 것을 고민하기보다 어떻게 안 버릴지를 고민하는 것이 더 나을 수도 있겠다. 모든 이성적인 판단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버리지 않을 이유를 기어이 찾아 내고야 말 것이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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