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그저 버리지 않았을 뿐인걸

<버리다>

by 선아키


아주 오랜만에 책상 위를 깨끗하게 치웠다. 회사를 가거나 작업실로 바로 향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라 이제는 집에 있는 책상을 쓸 일이 거의 없었기 때문에 책상 위에는 온갖 물건들이 놓여있었다. 사실은 놓였다가, 책상의 면적을 다 채우고 나서는 하나 둘 쌓여가고 있었다. 책상 위의 온갖 물건들은 말 그대로 집에 가져오긴 하나 이후에 자주 쓸 일이 없는 것들이었는데, 말하자면 이런 것들.


이제 한동안 쓸 일이 없을 여권, 미술관에서 하나 둘 챙겨 왔던 팸플릿들, 친구들에게서 받았던 청첩장들, 여기저기서 받아왔던 명함들, 읽으려고 산 책들과 읽다가 멈춘 잡지, 오래전 사용했던 노트북과 각종 충전 케이블, 현상하고 다시 나에게 돌아온 필름 뭉치들과 작은 삼각대, 메모와 일기가 산발적으로 적혀있는 공책들.



정리를 하려고 열었다가 서랍 안에서는 또 별의별 것들이 발견됐다. 언젠가 찍었던 증명사진들과 친구들에게 받은 편지들, 기념으로 사 온 배지들과 여분으로 사둔 펜들이 잔뜩. 특히 최근에 필요해져 사려고 벼르고 있던 컴퍼스(초등학교 시절 사용)와 원형 자(대학교 1, 2학년 정도에 샀으리라 추측), 메모를 묶는 링(대학교 때 영어로 발표할 때 쓰려고 구매한 것으로 추정)은 실제로 오늘 발굴해내 앞으로 사용하기로 했다.


최근엔 건축사 시험공부를 하느라 의도치 않게 아날로그 필기구들과 다시 친해지고 있는 중인데, 버리지 않고 두었던 삼각자들과 0.9mm 샤프와 B 샤프심, 여러 사이즈의 스케일 자와 같은 것들을 모두 내 방에서 빔의 것까지 공수했다. 좀 뿌듯했다. 내가 주섬주섬 세월의 흔적이 잔뜩 묻은 필기구들을 가방에서 주섬주섬 꺼내자 빔은 눈을 동그랗게 뜨며 왜 이런 것들이 집에 있냐고 물었다. 빔도 모두 한때 가졌던 것들일 테지만, 난 그저 버리지 않았을 뿐인걸.



쉽게 버리지 않는 것은 나뿐만 아니라 가족들이 다 그렇다. 가구와 가전은 기능이 다할 때까지 사용하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소파는 부서질 때까지, TV는 색이 변하며 화면이 일그러질 때까지, 에어컨은 냉방 능력을 잃을 때까지. 그래서 소파 테이블과 하다못해 쓰레기통까지 나보다 더 나이가 많음을 깨닫고 깜짝깜짝 놀라곤 한다. 앞서 오늘 내가 정리했던 나의 책상은 할아버지께서 쓰시던 물건이다.


그때그때 버리는 습관이 없어서 맥시멀리스트로 오해받곤 하지만 몇 가지 아이템을 발굴해 낸 오늘, 역시 아직 기능할 수 있는 물건들을 잘 저장해 놓았던 것이라고 스스로 뿌듯해졌던 오늘의 청소. 버리는 것만이 답은 아니잖아. (하지만 다시 사용하기까지 10년이 넘게 걸린 것은 함정.)




p.s.


정리 이야기를 길게 했지만, 사실 오늘 내가 하고 싶었던 이야기는 정반대였다. 버린다는 것은 오히려 다른 것을 선택하는 방법일 수도 있다는 맥락의 이야기를 하고 싶어 미리 '무언가를 버린다는 것은 다른 하나를 선택한다는 뜻일지 몰라'라는 제목까지 정해놨었지만, 글은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가주지 않았다. 선택에 앞서 어떤 것을 버리는 것이 쉬운지 상상하고 결정하는 소거법형 결정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었다. 그 이야기는 나중에 이어서 할 수 있는 기회가 있다면, 다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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