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페>
살면서 마신 커피의 총량을 계산해 본다면 분명 욕조 몇 개쯤은 차고 넘칠 테지만, 솔직하게 말하자면 나는 커피 맛을 잘 모른다. 향을 음미하기보다는 설계실에서 밤을 지새우며 의무감을 가지고 마시거나 기름진 속을 씻어 낼 요량으로 무조건 아이스요-하며 벌컥벌컥 들이켜곤 했으니 중요했던 건 질보다는 양이었다고나 할까. 아무래도 욕조 가득 마셔 본 지금은 신 커피가 싫다는 취향이 생기거나 태운 커피의 맛을 구별할 수 있을 정도는 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커피 맛이 궁금해서 카페를 찾을 정도의 짬은 없다.
카페라는 말이 커피를 어원으로 두고 있다고는 해도, 지금은 많은 사람들이 카페를 전문적으로 커피를 음미하기 위한 곳이라기보다 누군가를 만나기 위해서, 다양한 공간적 경험을 하기 위해, 육체가 안락할 수 있는 시간과 공간을 잠시 빌릴 수 있는 곳으로 여긴다. 애견카페, 만화카페, 수족관 카페, 갤러리 카페, 방탈출 카페 등 커피가 주인공이 아닌 공간들에도 카페라는 말이 꼭 따라붙는 것을 보면 더욱이 그런 생각이 든다.
커피를 잘 모르는 내가 카페에 가는 가장 큰 이유는 아무래도 누군가와 또는 나 스스로와 시간을 보내기 위함이다. 장소에 따라 다르겠지만, 좋은 공간감을 가진 카페에서는 마주 보고 앉은 사람과 이야기를 나누다 도저히 눈을 맞추지 못할 것 같은 순간이 오면 창밖이나 주변을 구경하는 척하며 딴청을 부리기 좋다. 입 안이 건조해지면 눈앞의 음료로 목을 축일 수 있다. 잔을 만지작거리거나 한 모금씩 들이키며 당신이 내놓은 말들에 대해 곰곰 생각할 수도 있다. 저와 나 사이에 놓인 잔들은, 앉은 의자와 테이블을 둘러싼 향은, 공간이 가지는 색은 나누는 이야기를 부드럽게 만드는 도구가 된다.
혼자만의 시간을 보내러 카페에 가면 나는 보통 카페 안이 한눈에 들어오는 가장 구석진 자리에 가서 앉는다. 책과 종이, 연필, 노트북을 펼쳐 놓고 뭐라도 하는 척을 하지만 사실 집중이 잘 되진 않아서, 나처럼 혼자 온 사람들을 관찰하며 직업과 성격을 상상한다. 테이블 위로 아주 어려워 보이는 책을 올려놓는다든지 하면 대학원생이겠군, 책상 빈 곳이 보이지 않을 만큼 이것저것 늘어놓고 이거 했다 저거 했다 하는 사람은 나와 비슷한 성향이겠군, 하는 식이다. 두엇이서 온 사람들의 대화를 라디오 삼아 듣는 날도 있다(확실히 해 두자면, 엿듣는 건 아니고 들리는 대화를 듣는다). 글도 쓰고 그림도 그리고 그렇게 사람 구경도 하다 보면 시간은 금방 지나간다.
열 걸음에 한 군데씩 카페가 있어도 또 새로운 카페가 환영받는 이유는 우리가 돈을 내지 않고도 사용할 수 있는, 여유롭게 시간을 보낼 수 있는 공간들이 제대로 제공되지 않아서일지도 모른다. 사 계절 중 쾌적한 계절이 짧은 우리나라에서는 편히 앉아 쉴 수 있는 외부공간들이 부족할 수밖에 없다. 사람들은 자연스레 돈을 내어 머무를 장소를 찾고, 점점 커피 말고도 사람들을 불러 모을 수 있는 다른 매력이 필요해졌다. 요즈음엔 이전에 미술관과 갤러리에서나 볼 수 있었던 작품과 공간들이 카페에서 전시되고 구현된다. 단단한 정체성을 가진 브랜드로서 운영되는 곳들도 많다. 그러나 너무 많은 사람에 치여 공간도 대화도 음료도 제대로 즐기지 못하는 경우도 왕왕 있으니, 과유불급일지도 모르겠는 생각도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