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
01
간밤에 꿈을 꿨는데 말이야, 라며 꿈 이야기를 시작하는 사람들이 많지만 사실 꿈은 아침에 있다. 그래서인지 다급하게 일어나서 출근 준비를 해야 하는 아침에는 꿈을 잘 기억하지 못한다. 대신 여유롭게 늦잠을 잘 수 있는 아침에는 한 편의 영화를 보는 것 같을 정도로 다채롭고 생생한 꿈을 꾼다. 냉장고 속을 통해서 다른 냉장고가 있는 곳으로 이동할 수 있다거나 스님과 무당의 뜻 모를 의식을 슬쩍 훔쳐보는 일, 전쟁이 일어나기 직전에 선발대로 서 있는 사람이 되는 건 영화를 보는 것만으로도 상상하기 어려운 경험일 거다. 꿈은 1인칭이니까. 그래서 스릴러를 즐기지 않는 나에게 조마조마한 꿈이라도 들이닥치면 아주 피곤한 아침을 맞이하게 된다. 어렸을 적에는 전력으로 달리거나 누군가를 때리는 꿈을 꿀 때마다 옆에서 자는 동생을 발로 걷어차며 잠에서 깨곤 했다. 너무 생생하게 꿈을 꾸는 탓이었다. 나는 적을 물리쳤을 뿐인데.. 일어나서 옆구리를 짚고 나를 분한 표정으로 쳐다보는 동생에게 미안하다고 사과할 수밖에 없었다.
꿈속에서는 시간도 공간도 뒤죽박죽이다. 일 분이 한 시간이 되었다가 하루가 일주일이 되기도 하고, 고개를 돌리면 다른 장소로 가고 허리를 숙이면 다른 사람이 되기도 한다. 어쩌면, 세상의 수많은 동화와 흥미진진한 이야기들은 어쩌면 꿈속에서 등장한 이야기를 재현한 것뿐일지도 모른다. 언젠가는 나도 꿈으로 이야기를 쓸 수 있을지도 모르니 종종 꿈속의 이야기와 공간들을 모은다. 잠을 자면 아무런 대가 없이 이야기가 자동으로 재생된다니 이 얼마나 꿩 먹고 알 먹고인지! 가끔 재미있는 꿈을 꾸면 눈을 뜨자마자 애인에게 말해 주곤 하는데, 애인이 아주 웃긴 이야기처럼 들어주어서 더 열심히 기록해 놓아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02
꿈에 나오는 사람들은 최근에 떠올린 사람도,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다. 누군가 나에게 연락을 하며 네가 꿈에 나와서 연락했어,라고 말하면 조금 부끄러워진다. 나의 꿈에 나오는 사람들은 보통 내가 그리는 사람들이기에 그렇다.
03
꿈을 꾸는 중인 사람에게 말을 거는 것도 재미있다. 어느 날인가에는 애인이 눈을 부스스 뜨고 돌아가신 할아버지를 만나 세배를 하는 꿈을 꾸었다고 했다. 내가 나왔냐고 물으니 다시 잠에 빠지면서 돈가스.. 비엔나소시지..라고 말해서 너무 웃겼다. 동생이랑 함께 살 때에는 꿈꾸는 동생한테도 자주 말을 걸었었는데, 아무래도 평소에는 보기 어려운 무방비하고 무의식적인 모습이 귀엽고 웃기다고 생각한다.
04
또 다른 뜻의 꿈에 대해 이야기할 수도 있을 것 같다. 나는 꿈이 엄청 많은 애였다. 어린 내가 보는 세상에는 멋진 사람과 사건들이 너무 많았다. 나는 간호사, 파일럿, 건축가, 플로리스트, 여행가, 고고학자, 화가, 외교관이 되고 싶었다가 어느 순간에는 지리학자, 보석 감정사, 다큐멘터리 사진작가, 소설가, 교사, 무대 디자이너, 만두가게 사장님, 만화가, 안무가, 의사, 군인, 농부, 목수, 피아니스트, 모델이 되고 싶기도 했다. 당장 생각나는 지나친 꿈들만 꼽아도 이 정도이니 아마 어린 나는 훨씬 더 많은 것들이 되고 싶었을 거다.
한 가지 일만 하며 살 수는 없는 세상이 되어서인지, 나는 이전에 꾸던 여러 꿈을 포기하지 않고 살아간다. 나와 접점이 없는 것처럼 보이는 일을 하는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간접적으로 볼 수 있는 매체도 늘었다. 시간은 가고 나이도 들어가기는 하지만, 그럴수록 꿈을 꾼다는 것이 거창한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하고 싶은 일들을 하나씩 해 나가다 돌아보면 이뤄버린 것일 수도 있고, 이루는 중일 수도, 얼마든지 뒤죽박죽이고 엉망진창일 수도 있는 거니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