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는 깊어지고

<밤>

by 빈부분

직장인의 신분으로 지낸 요 몇 년 동안에는 밤에 잠을 자는 게 정신건강에 이롭다는 걸 깨닫고 꼬박꼬박 침대로 가지만, 원래의 나는 밤에 잠을 잘 안 잤다. 쉬든 놀든 일을 하든 내 주도 하에, 내가 책임져 끌고 가는 ‘진짜내 시간은 모두가 잠들고 난 밤에 있는 경우가 많았다. 게다가 밤에는 산만하게 보이는 것들이 모두 가라앉고 공기가 차분해진다. 울리던 카톡 대화도 끊기고, 시끄럽던 창밖의 소리도 사라진다. 무엇에든 집중하기 좋은 시간이다.


잠들지 않는 밤에 나는 보통 소설을 읽었다. 심오한 고전을 읽는 건 아니고, 울고불고 짤 수 있는 연애소설이나 속 시원한 판타지 소설을 봤다. 다 읽고 나면 무슨 내용인지 잘 기억나지 않았지만, 읽는 순간만큼은 다른 세계에 있었다. 그게 너무 좋아서 고등학교 때에는 인강 들으라고 물려받은 PNP에 소설을 넣고 이불 밑에서 읽었다(수능에서 언어 영역만큼은 자신 있었는데, 이때 읽은 소설들 덕이라고 확신한다). 노래도 많이 듣고 만화도 많이 봤다. 미래라든지 시험, 하지 않아도 되는 걱정들 때문에 불안한 마음이 드는 밤들도 있었지만, 보통은 나 또는 다른 사람이 만드는 이야기를 씹고 뜯으며 위안받고는 했다.


사진 2019. 6. 14. 오후 10 50 06.jpg


대학에 입학해 자취를 시작하고 나서 밤을 이야기로 채우는 일은 훨씬 더 쉬워졌다.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술을 마실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상하게 술을 마시면 작은 이야기도 커지고 큰 이야기가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느껴져서 말하는 입과 듣는 귀가 지치지 않았고, 아무 이야기가 아무에게나 전해지곤 했다. 나는 해가 뜰 때까지 이 사람 저 사람과 함께 이 술집 저 술집을 전전하며 이야기들로 시간을 채웠다. 갈 술집이 마땅치 않거나 돈이 없으면 원룸에 끼어 앉아 소주에 이야기를 타서 마셨다.


나는 건축학과를 다니고 있었으므로 술을 마시지 않는 밤이면 설계실 책상 앞에 앉아 이야기를 지었다. 이야기 짓는 것을 좋아하기도 했지만 우리가 받아내는 과제들은 보통 이야기를 잘 지어 내야만 했다. 그래서 과제를 하다 술도 자주 마셨다. 내 주변의 사람들 대부분은 이야기를 지어내 주거니 받거니 하는 걸 좋아했으므로, 나의 밤은 늘 술과 여러 사람들의 이야기로 분주하고 넉넉했던 것 같다.


밤의 이야기를 생각하면 떠오르는 애니메이션 영화가 있다. 미셀 오슬로 감독의 <Prince and Princess>라는 작품이다. 2001년에 개봉한 영화이니까 꼭 이십 년이 되었지만 처음 그 영화를 보았을 때의 두근거림이 잊히지 않는다. 도시의 밤이 시작되는 시간, 작업실의 세 사람은 하고 싶은 이야기를 늘어놓고 소품을 만들어 막을 올린다. 정교한 실루엣과 밤이기 때문에 더 강하게 빛나는 화려한 색들이 깊이감을 준다. 영화 속의 이야기가 하나씩 흘러갈 때마다 나의 밤도 점점 깊어진다. 나의 밤들과 비슷한 밤의 모습이어서 더 가깝게 느껴졌는지도 모르겠다.


앞으로의 밤에도 누군가와 많은 이야기를 지어내고 웃고 울 수 있기를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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