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빈부분 Nov 15. 2021

비밀이 비밀답기 위해서

<비밀>

 세상에 마음속 비밀 하나 감추지 않고 살아가는 사람은 없을 거다. 말하기에는 조금 창피한 습관, 속앓이, 사랑, 욕망, 험담 같은 것들이 그런 비밀이 된다. 나 스스로나 다른 사람의 사회적 면이 무너지지 않도록, 또는 소원을 빌고 난 아이처럼 내뱉으면 이루어지지 않을까 봐 부러 소리 내어 말하지 않는 것들. 나는 종종 그런 비밀들을 떠올리며 부끄럽고 지끈거리는 마음을 부여잡거나 슬픔에 빠지거나 행복해진다. 


 몇몇 비밀들은 비밀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마저도 비밀이어야만 할 때가 있었지만, 그렇지 않은 비밀들은 둘 이상이 알고 있어서 더 재미있었다. 너와 나만이 알고 있는 것. 그 사건에 대해서 이야기할 수 있는 건 서로뿐이라는 사실은 비밀의 내용뿐만 아니라 그 비밀을 알고 있는 너와 나를 특별하고 매력적인 사람으로 만들었다. 그래서 누군가가 나에게 비밀을 말해 주면 아주 기쁜 마음이 들었던 것 같다. 열 살 즈음 되었을 때엔 그게 좋아서 일부러 비밀들을 많이 만들고 써 놓을 수 있는 일기장을 썼다. 학교 앞 문방구에서 살 수 있는 물건들 중에서는 꽤 고가의 물건이었지만 두 명의 용돈을 합치면 되니까. 분홍색 하드 커버의 표지에 하트 모양 자물쇠가 달려 있었고, 열쇠도 두 개가 들어 있어서 친구와 하나씩 나눠 가지고 번갈아 각자의 비밀들을 써 내려갔다. 지금은 얼굴도 잘 기억나지 않는 친구에게 나는 많은 이야기를 했다. 누가 좋고, 누가 싫고, 무슨 일이 있어서 이런 마음이 들었고. 지금 생각하면 그냥 툭 내뱉을 수도 있는 마음들이었지만, 그때에는 그 마음이 나의 전부였기 때문에 그렇게 꽁꽁 잠가 놓았을 것이다. 


 비밀은 말하지 않는 데에 그 의미가 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비밀이 재미있어지려면, 누군가가 그 비밀을 발견하지 않으면 안 된다. 안에 무엇이 있는지는 몰라도 굳게 닫힌 자물쇠, 둘 이상의 맹세, 누군가가 눈치챌 수 있게 조금 삐져나온 실마리, 궁금해하는 표정들. 비밀이 진짜 비밀다워지려면 그런 것들이 필요하다. 아무리 꽁꽁 감춘 것이라고 하더라도, 아무도 발견하지 못하고 궁금해하지 않으면 그건 조금 매력 없는 비밀이 되어버린다. 어쩌면 아예 존재하지 않는 마음이나 일로 사라질지도 모르는 일이다. 


 때로는 짐짝 같은 비밀을 간직해야 할 때가 있다. 누군가에게 이야기를 하는 것도 하지 않는 것도 고통스러운 일이 생기기 마련이니까. SNS를 하다 보면 그런 이야기들을 쉽게 접할 수 있고 ‘ㅇㅇ학교 대나무 숲’ 같은 페이지들도 많이 있다. 물론 글쓴이가 누구인지 어느 정도 유추할 수는 있겠지만 무겁고 어려운 혼자만의 비밀을 털어놓으면서 편안해지는 경험은 많은 사람들이 겪어 본 일이 아닐까 생각한다. 


 누군가가 비밀 일기장 자물쇠를 자르고 내용을 읽어버린 후로부터는 일기장에 비밀 이야기를 쓰지 않지만 내가 간직하는 비밀은 꾸준히 생기고 또 사라진다. 별로 알고 싶지 않은 비밀도 있고 우울한 비밀도 있겠지만 올해가 다 지나간 마당에 남은 2021년에는 불안하고 속상한 비밀들 말고, 누구 몰래 파티를 열어 준다든가 선물을 준비한다든가 하는, 신나는 비밀들을 많이 만들어야겠다. 

매거진의 이전글 금기는 곧 비밀이 되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