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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빈부분 Dec 27. 2021

좋은 핑계

<연말>

 12월이 되면 서울의 나무들은 전구를 걸치기 시작한다. 낮보다 밤에 빛은 더 따뜻해지고, 귀가 떨어질 것 같은 바람이 불고, 출퇴근 길 지하철을 타면 사각거리며 맞닿는 패딩 소리가 들린다. 정신없이 하루를 보내다가도 크리스마스이브에는 무엇을 할지, 저녁에는 무엇을 먹을지 고민이 된다면, 진짜 연말이 다가온 거다. 


 나는 일 년 중 어떤 공휴일이나 명절보다 연말의 공휴일들을 가장 좋아한다. 크리스마스와 신정 사이 즈음의 기간. 그 시간은 머뭇거리기 일쑤인 나에게 좋은 핑곗거리가 되어 준다. 한 해를 마무리하는 것을 핑계로 잘 연락하지 못했던 사람들에게 안부 인사를 건넨다. 뒤쳐질까 전전긍긍할 걱정 없이, 잠깐 걷던 길을 뒤돌아보고 앞으로 남은 길을 가늠하고 누구와 걷고 있는지 주변을 살핀다. 그래서인지 누구에게나 조금은 후한 마음이 들고 예민하던 마음이 풀어지는 시기이기도 하다. 


 전 세계 사람들이 같은 달력 아래 한 해를 마무리한다고 생각하면 조금 이상한 기분이 든다. 모두가 새로운 한 해를 맞이할 준비를 해야 하니까 지구가 조금 느리게 도는 느낌이라고 할까. 지구 반대편의 누군가도 자신의 친구나 가족들과, 혹은 조용히 혼자만의 한 해를 정리할 거다. 


 일 년을 마무리하는 방법은 각자 다르겠지만 대개 지난 한 해를 돌아보고 다음 한 해를 계획하는 것 같다. 그래서 건강, 성취, 취향과 호불호, 관계와 사랑 같은 단어들이 일 년 중 가장 많이 등장하는 시즌이 아닌가 하고 생각한다. 올해의 사랑은 어땠는지, 내년의 행복은 어떤 것일지. 사진첩과 sns, 통장, 편지 같은 각종 기록들을 정리한다. 띠링띠링 정산되어 나온 결과물들은 구체적일 수도, 막연할 수도 있겠지만 직접 경험한 것들만이 줄 수 있는 용기나 생각은 삶의 방향을 결정짓기에 일 년 중 뒤돌아볼 수 있는 이 시기가 퍽 소중하다. 

  

 여전히 마스크를 못 벗기는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일이 있었던 올해가 지나간다. 나에게 2021년은 파도 같은 해였다. 연인과 법적인 보호 관계를 맺었고, 그래서인지 함께 다양한 사람들을 많이 만났고 새로운 취미를 발견했다. 잘하고 좋아할 수 있는 것들이 더 생겼다. 나에 대해 조금 더 익숙해졌고, 갈 길은 멀었지만 조금 멀리서 스스로를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 내년에는 어떨까. 내년에도 올해처럼 오지 않을 것 같던 나이가 오고, 가까워진 것들과 멀어지는 것들이 생기고, 하지 않을 것 같던 생각을 하고 또 올해에는 못 보던 것을 보게 될 거다. 끝과 시작은 항상 붙어 다니는 단어니까, 나뿐만 아니라 곁의 사람들에게 새로운 시작들도 왕왕 생길 거다. 낯설다는 이유로 새로운 선택을 주저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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