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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빈부분 Jan 10. 2022

얼굴이 빨개지고, 목소리가 떨리기도 하겠지만

<처음>


 인간에게 가장 적절한 축복은 망각이라고들 한다. 매일매일 새로운 사건들이 일어나지만 우리의 뇌는 꽤 똑똑하게 작동해 이전의 기억 위에 새로운 경험을 덧씌워 지나간 것들을 잊게 한다. 그러나 뛰어난 뇌의 작용에도 쉽사리 덮이지 않는 것이 있으니, 그것은 각종 처음들이다. 첫걸음마, 첫 출근, 첫사랑, 첫눈, 첫 등교 같은 기억들. 물론 너무 어렸을 때나 반복적인 것들, 심하게 충격적인 사건들은 잊히기도 하지만, 근본적으로 처음이라는 것에 대한 기대와 긴장이 주는 신선한 충격이 어떤 특정한 기억을 오래 간직할 수 있는 이유가 아닌가 생각한다.  


 나는 이름들이 가진 유래를 찾아보는 걸 좋아한다. 이름의 이야기를 들여다보면 생각지도 못했던 세상이 있기 때문이다. 밤하늘의 별, 유명한 장소, 빵집에서 흔하게 파는 과자의 이름들을 검색해 보면 사람 이름에서 따온 경우가 많다. 샌드위치, 마들렌, 군평선이, 비스크, 무슨무슨 광장 등등.. 물론 그랬다더라-하고 말 수도 있는 이야기들도 있지만, 무언가를 처음 발견하거나 개발하거나 발명한 사람의 이름이라고 하면 그렇구나, 하고 쉽사리 고개를 끄덕일 수 있는 것이다. 모두의 처음이 되어 오랜 시간 동안 이름이 불려 왔을 사람들을 생각하면 무어라도 처음 해 본 사람이 되고 싶어진다. 한때는 욕심을 내면 나의 이름을 붙인 무언가를 만들어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조금 살다 보니 꼭 일등이나 처음이 되려고 애쓰지 않아도 잘 살다 사라질 수 있을 것 같다. 


 처음이 잘 기억되긴 하지만, 꼭 길이길이 남겨야만 의미가 있는 게 아니다. 생각해 보면 매일 아침은 누구에게나 처음 맞이하는 아침이다. 정말 미세하게 달라서 눈치채기 어려울 수는 있어도, 매일같이 출근하는 길도 사실은 매일이 다르고 만나는 사람들도 사실은 어제와는 다른 사람인 것이다. 정말 당연하지만 알게 모르게 우리는 이렇게 많은 사람들과 또 이렇게 많은 매일을 처음 맞으며, 복닥복닥 살아간다. 어쩌면 처음은 진짜로 처음이라서 특별한 것이 아니라 처음의 마음으로 주변을 볼 수 있는 마음에 특별해지는 것일지도 모른다. 


 교환 학생 신분으로 바르셀로나에 머무른 적이 있다. 바르셀로나는 카탈루냐 지방의 핵심 도시로, 스페인어를 사용하지만 카탈란이라는 지역 고유의 언어를 동시에 사용했다. 그런고로 대학의 몇몇 수업은 스페인어뿐만 아니라 카탈란으로만 진행되기도 했는데, 강의 계획서에는 스페인어로 수업을 한다고 해 놓고서는 오티 때부터 카탈란을 사용하는 수업도 왕왕 있었다. 스페인어도 못 하는 나에게 개강 첫날은 가혹했다. 언어의 장벽과 새로운 환경에 이리저리 치여 잔뜩 녹초가 되어 집으로 돌아왔다. 소파에 널브러져 너무너무 힘들었다고 하소연하는 내게, 나의 카탈란 파파이자 플랫 메이트였던 알베르트가 말했다. 누구에게나 처음은 어려운 법이지! 그러고는 확신에 차서 앞으로의 학교 생활이 더 나아질 것이라고 말해 주었다. 똑같이 힘든 상황도 익숙해지면 괜찮아진다고. 그의 말처럼 첫날과 크게 다르지 않은 둘째 날, 셋째 날이었지만 누구나 힘든 처음이라고 생각하면 그럭저럭 익숙해질 수 있었던 것 같다.


 올해는 나와 내 주변 사람들에게 많은 변화가 있을 것 같다. 처음 맞이하는 새로운 상황에 가슴이 두근거리고, 얼굴이 빨개지고, 목소리가 떨리기도 하겠지만 늘 그러했듯 잘 넘어가고 마감하고 쏟아내 이겨낼 거라고 믿는다. 모두의 처음을 응원하는 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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