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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선아키 Jan 10. 2022

처음이 쉽거나 또는 어려운 사람

<처음>

일본에서 지내던 동생 민아가 집으로 돌아왔다. 민아는 돌아오자마자 많은 것들을 시작했다. 필라테스와 PT 수업을 등록하고, 목도리를 만들 것이라며 뜨개질을 시작했고(지금은 귀마개를 뜨고 있다.), 일주일에 한 번씩 이탈리아 요리 클래스를 다니더니 또 마시지도 않는 막걸리 원데이 클래스에 다녀와 나에게 막걸리와 귤 주를 선물하질 않나, 운전면허를 따더니 좋은 선생님을 구해 연수까지 마치는 데에 이르렀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틈틈이 집에 있는 물건들을 당근으로 팔아치웠고(당근 온도가 44.6도까지 올랐다.), 일주일에 두 번 영어 스피킹 학원에 다니면서, 2주에 한 번씩은 피부과에 다녀왔고, 기회가 될 때마다 일주일에 두세 번은 코로나 임시 선별 진료소에서 알바를 하거나 게스트하우스 청소 알바를 다녀왔다. 그러면서도 며칠에 한 번씩은 각종 취업 사이트에서 스타트업 채용 정보들을 훑었다. 조만간 새로운 분야에 도전하기 위해 부트캠프를 신청한다고 한다.


민아는 멀리서 보면 퇴사 후 집에서 노는 백수였으나 동시에 가까이서 바라보면 쉴 틈 없이 많은 처음을 겪고 있었다. 그렇게 동시다발적으로 다양한 처음을 경험할 수 있다는 사실은 나에겐 놀라운 일이었다. 민아의 시작에는 거창한 이유가 없었고, 재미있을 것 같다는 한 마디가 전부였다. 처음의 이유는 그토록 간단했다.



반면 나는 처음을 오래도록 생각해야만 했다. 즉흥적인 시작은 인생에 없었다. 처음을 준비할 수 없는 첫 만남, 첫인사, 학교와 직장에서의 첫날 같이 처음이 들어가는 모든 설레는 단어들은 기쁘지 않았다. 나의 분야가 아닌 것에 대해선 쉽게 흥미가 생기지 않았고, 호기심이 없으니 무심하게 많은 것들을 지나쳤다. 그러니 민아가 어떻게 그렇게 많은 처음을 겪어내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고, 어차피 끝까지 갈 일이 아니라면 왜 그런 잦은 시작을 하려 하는지 묻는 날들이 이어졌다.


나는 마음을 매일 조금씩 모아 두고 천천히 다지고 나서야 행동으로 옮길 수 있었다. 처음을 일단 만들어 내고 나면 질리지 않고 계속할 수 있었다. 나는 조심스럽게 사진을 찍기 시작했고, 일기장에 오래도록 혼자 쓰던 글을 조금씩 내보낼 수 있는 글로 바꿔 쓰고 있다. 직업에 대한 불타는 열정과 몰입은 없었으나 나에게 맞는 부분들을 찾아 지금까지 7년째 설계를 직업으로 삼을 수 있었다. 작년부터는 코로나로 인해 쉬었던 운동을 다시 시작했고, 아마도 별 이유가 없는 한 그만두지 않을 것이다.


나는 자주 민아에게 처음을 시작할 수 있는 이유에 대해 묻고, 민아는 나에게 지속할 수 있는 끈기에 대해 묻는다. 아마도 우리는 극단적으로 처음을 시작하는 용기와 지속할 수 있는 끈기를 나눠가진 모양인데, 아직 이렇게 타고난 것을 어떻게 다시 적당히 나눠 가질 수 있을지 방법을 찾지 못했다. 나는 민아가 시작을 권하는 여러 가지 것들을 다양한 이유로 미루거나 거절하고, 민아는 왜 시작한 것을 지속하지 않냐는 나의 잔소리를 곧이곧대로 견뎌내며 이불을 뒤집어쓴다.



새해가 되었고 우리는 어떤 교집합에 이르러 테니스를 함께 배우기로 합의했다. 약속과 같이 거창한 다짐도, 경험이나 해보자는 가벼운 충동도 아니었기 때문에 우리의 이러한 합의가 어떤 방향으로 어디까지 나아갈 수 있을지는 아직 잘 모르겠다. 수많은 처음을 손에 쥐는 민아와 한 번 잡으면 웬만해선 질리지 않는 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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