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년 10월.
네이버 블로그 https://blog.naver.com/bincent_kim/ 2018. 11. 1. 0:38 작성.
오랜만에 갤러리를 찾았다. 방앗간 못 지나간다고 차를 갖고 나올 일이 있었는데 여지 없이 사간동, 소격동을 들렀다. 지난 포스팅에서 얘기한 것처럼 그림을 본 지 한 달이 지나면 꼭 발걸음을 그 동네로 떼게 된다. 한남동, 평창동, 청담동, 좋은 곳도 많은데 항상 그쪽으로 먼저 향하게 되는 것은 서울관을 중심으로 늘 괜찮은 전시들이 있기 때문에 큰 생각없이 들러도 언제나 보기 좋은 그림들을 감상할 수 있다는 것 때문이다.
그래도 이번에는 조금 생각을 하고 나섰다. 학고재의 컬렉션 전시와 권순관 작가의 전시도 끌렸고 갤러리 현대의 '색면추상', 금호갤러리의 NEW WAVE III, 뭐 하나 지나치고 싶은 것이 없었다. 다녀온 뒤 하나씩 차근차근 써보려고 하니 그 중 갤러리 현대 신관의 '라포르 서커스'가 제일 먼저 떠오른다.
평소 원색이 다채롭게 쓰이고 화려한 이미지를 갖고 있는 그림을 좋아한다. 무채색이나 차분한 이미지가 줄 수 없는 생기와 경쾌함을 주기 때문이다. 김종학 화백을 굉장히 좋아하는 이유도 작품에서 그런 에너지를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전시의 대표 이미지도 그런 느낌을 주었다.
첫 공간에서 볼 수 있는 3개의 조각상은 마치 이 전시를 반겨주는 듯 하다. 형형색색의 받침대 위에 깔끔하게 흰 색으로 만들어진단원들은 높이 떠 있어 신비로운 느낌을 자아내는 동시에 외롭게 보이기도 한다. 그 벽면에 써있는 '라포르 서커스' 책의 발췌 내용은 정말 와닿는다.
2층에 가면 전시장 가운데 의도적인지 모르겠지만 다소 불편한 의자와 함께 책이 놓여있다. 앉아서 첫번째 챕터를 읽었는데 상당히 몰입감이 있었다. 곡예를 하는 아슬아슬한 모습과 놀라는 관중들이 눈 앞에 펼쳐지는 듯 했다. 판타지에 관심이 많이 없는 편인데도 순식간에 읽을 수 있었다.
정말 좋았던 점은 읽다 고개를 들어 그림을 보고 눈을 감고 조각들을 떠올리면 정말 그 세계에 빠져드는 기분이 든다는 것이다. 관람객도 거의 없어 나 혼자 연극의 중심에 있는 느낌이 들었다. IMAX에서 인터스텔라를 보았을 때보다, 4D랍시고 의자가 움직이고 바람을 쏴대는 것보다 훨씬 소박하지만 살에 닿는 입체적인 전시가 아닌가 싶다.
그 분위기에서 조금 더 진득하니 책을 읽고 싶었는데 보고 싶은 것들이 너무 많아 지하로 발걸음을 옮겼다. 지하에는 첫 챕터에 나오는 맹인 곡예사 조각이 크게 설치되어 있다. 방금 읽었던 내용의 주인공이 바로 눈 앞에 튀어나온 듯 하다. 갤러리 설명에 따르면, "극명한 현실과 꿈 속에 나올 법한 환상이 하나의 공간에 채워지는 이번 전시는 관람객들을 작가의 상상 속 마술의 세계로 안내할 것"이라고 하는데 그림들을 보고 있으면 정말 빠져드는 것 같다.
서구 고전 회화에서 영감을 많이 받았다고 하는데 16,17세기의 작품들이 떠오르는 그림들이 많았다. 집에 와서 곱씹어보니 책도 다 읽지 않고, 고전 회화에 대한 지식도 거의 없다시피해서 이번 전시를 100% 향유하지는 못한 것 같아 아쉬운 기분이 든다. 12년, 15년에도 개인전이 있었는데 다음 번에 전시를 한다면 좀 더 반가운 마음으로 접할 수 있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