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겨울, 손을 놓는 일에 대하여
겨울이 되면 손이 시리다.
장갑을 끼어도 손끝까지 냉기가 스며드는 날이 있다.
그런 날에는 무언가를 꽉 쥐고 있기가 힘들다.
손에 힘이 빠지면서 자연스럽게 놓게 된다.
오래 쥐고 있던 것을 내려놓는 일도 비슷한 것 같다.
어느 순간 더 이상 쥐고 있을 힘이 없어져서 놓게 된다.
스스로 놓은 건지, 손에서 미끄러져 떨어진 건지
구분이 안 되는 경우도 있다.
어쩌면 둘 다일 수도 있다.
지난해는 그런 한 해였다.
오래 붙들고 있던 것들을 하나씩 내려놓았다.
처음에는 고통스러웠다.
붙들고 있는 동안에는 그것이 나를 지탱해주는 것 같았으니까.
손을 놓으면 어디론가 떨어질 것 같았다.
그래서 더 세게 움켜쥐었다.
손바닥에 자국이 날 정도로.
그런데 막상 놓고 나니 떨어지지 않았다.
그냥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주변을 둘러보니 풍경이 달라 보였다.
손에 쥐고 있던 것에 가려서 보이지 않던 것들이 눈에 들어왔다.
붙잡고 있던 것이 나를 지탱해준 게 아니었다.
오히려 나를 그 자리에 묶어두고 있었던 것이다.
밧줄처럼.
오래되어서 낡아빠진, 손을 베이게 하는 거친 밧줄처럼.
사람들은 흔히 '인연'이라는 말을 쓴다.
좋은 의미로 쓰일 때가 많다.
하지만 모든 인연이 좋은 것은 아니다.
어떤 인연은 시작부터 어긋나 있고,
어떤 인연은 도중에 변질된다.
처음에는 서로를 살리는 관계였다가
나중에는 서로를 갉아먹는 관계가 되기도 한다.
그런 관계에서 벗어나는 일은 쉽지 않다.
오래 함께했다는 사실 자체가 족쇄가 된다.
이만큼 왔는데 이제 와서 어떻게 하냐는 생각.
매몰비용의 오류라고 하던가.
이미 투자한 것이 아까워서 손해를 보면서도 계속 붙들고 있는 것.
나도 그랬다.
아깝다는 생각 때문에 놓지 못했다.
여기까지 왔는데. 이만큼 쏟아부었는데.
그 생각이 발목을 잡았다.
어느 순간 깨달은 것이 있다.
이미 지나간 시간은 돌아오지 않는다는 것을.
아무리 붙들어도 지나간 것은 지나간 것이라는 것을.
그렇다면 남은 것은 앞으로의 시간뿐이다.
앞으로 어떻게 살 것인가.
그 질문 앞에서 과거에 들인 비용은 의미가 없다.
중요한 것은 지금부터다.
손을 놓았다.
생각보다 어렵지 않았다.
오히려 왜 이제야 놓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손바닥에 남은 자국을 보며 피식 웃음이 났다.
참 오래도 쥐고 있었구나.
놓고 나서 후회가 없었던 건 아니다.
한동안은 빈손이 어색했다. 허전했다.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는 날들이 있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알게 되었다.
그 빈손으로 할 수 있는 일이 많다는 것을.
새로운 것을 집을 수도 있고,
아무것도 집지 않을 수도 있다.
선택은 온전히 나의 것이다.
자유라는 것이 그런 거구나 싶었다.
거창한 게 아니다.
그냥 내가 무엇을 할지 내가 정하는 것.
누군가에게 끌려다니지 않는 것.
그뿐이다.
창밖으로 겨울 햇살이 비친다.
손이 시리지만 장갑은 끼지 않았다.
이제는 무언가를 꽉 쥐고 있을 필요가 없으니까.
손을 호주머니에 넣고 천천히 걷는다.
앞으로 어떻게 될지는 모른다.
잘될 수도 있고 안 될 수도 있다.
하지만 적어도 지금은 가볍다.
어깨도 가볍고 마음도 가볍다.
오래 쥐고 있던 밧줄을 놓았다.
손바닥의 자국은 아직 남아 있지만,
곧 사라질 것이다. 새살이 돋듯이.
시간이 지나면 그렇게 된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든다.
지금까지 잘 버텼다고. 수고했다고.
아무도 해주지 않는 말이지만,
스스로에게 해주고 싶다.
그래. 수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