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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담담글방 Sep 16. 2023

서핑에서 배운 것

여름 내내 고성의 새파란 바다가 보고 싶었다. 상황이 되기를 기다리면 계속 못 갈 거 같아 주중에 무리해서 떠난 1박 2일 짧은 여행.


고성은 무려 9개월 만이었다.


가는 길에 양양에도 들렀다.


양양 핫플이라는 서피비치는 이국적이었 날씨를 보고 날짜를 고른 보람이 있게 하늘과 바다는 파랬다.


함께 간 후배는 그곳에서 서핑을 하고 싶어 했지만 이동 중 차가 갑자기 고장 나 견인차를 부르는 바람에 시간이 꽤 지나 버렸다. 결국 더 늦기 전에 고성 숙소로 향해야 했다.  


양양 서피비치


숙소에 짐을 풀고 고성 천진해변에 오니 수심이 깊은 곳에서 서퍼들이 늦도록 서핑을 하고 있었다. 수영도 서핑도 잘하는 사람들 같았다.


어스름 해가 지도록 남아있던 한두 명의 서퍼가 사라지고 완전히 어두워질 때까지 후배와 간단한 인터뷰를 했다.


드라마 작가가 되기까지의 고생에 대해서는 이미 많이 들었다고 생각했는데 처음 들은 내용도 많았다. 치열하게 살고 노력해 왔구나, 십 년 남짓한 시간을 다 알 수는 없지만 새삼스럽게 고개를 끄덕이게 되는 부분도 있었다.


지나고 보니 꽤 열정적이었던, 왜 그렇게까지 했을까 싶을 정도로 별 성과도 없이 일했던 나의 이삼십 대도 떠올랐다.


후배와 한 시간 넘게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어두워진 바닷가는 이가 딱딱 부딪힐 정도로 추웠다. 근처 식당에  따끈한 음식으로 몸을 녹이고 싶었지만 마땅히 들어갈만한 곳이 없어서 편의점을 찾았다.


컵라면, 반숙란, 김밥에 삼각김밥, 바나나 단지우유까지. 늦은 저녁, 나름의 만찬을 즐겼다.


천진해변의 서퍼들. 수심이 꽤 깊다



다음날 아침.


집에 가야 하는 시간과 피로도를 고려해 양양 대신 고성에서 서핑을 했다. 나는 고질적인 어깨 통증과 운전해 가야 하니 컨디션 조절이 필요할 거 같아 서핑을 하지 않을 생각이었는데 막상 서핑샵에 도착하니 코앞에 파란 바다를 두고 구경만 하기가 아깝게 느껴졌다.


파란 바다에 풍덩 뛰어들고 싶은 충동.


웻슈트를 입으면 춥지 않으니 서핑보드에 한 번이라도 올라가 보자 하는 가벼운 마음으로 강습 신청을 했다. 후배도 나도 폰을 사물함에 두고 온 데다 강습 사진을 찍어주는 곳은 아니라 단 한 장의 사진도 남지 않았다.


나는 이번이 네 번째 서핑인데 그전까지 제대로 선 적이 거의 없다. 서핑 용어로는 서프보드 위에 일어서는 걸 테이크오프라고 하는데 항상 몸을 세우기도 전에 바다에 빠지곤 했다. 이번에도 제대로 설 수 있을까 자신 없는 상태로 바다에 들어갔는데 하필 파도가 무척 셌다.


서핑을 잘하는 사람들한테는 센 파도가 좋겠지만 나에게는 보드가 다른 사람에게 향하지 않게 붙잡고 버티는 것만으로도 버거웠다.


작년에 고성에 놀러 와서 처음 서핑을 했던 후배는 이번에도 밸런스를 잘 잡았는데 나는 아주 잠깐 빛의 속도로 섰다가 바다에 빠져버렸다.


그런데 계속된 실패에도 이전과 다른 기분이 들었다.  서핑 보드를 잡고 파도를 기다리며 보드의 테일 부분을 눌러 파도의 저항을 줄이는 과정이 처음에 비해 익숙하게 느껴졌다.


2년 전 첫 강습에서파도가 밀려오면 보드 잡고 버티기도 어려웠는데 이제는 제법 파도의 흐름을 알고 보드가 받는 저항을 줄일 수 있는 것만 같았다.


강습 차례가 올 때까지 파도를 기다리면서 온몸을 후려치는 파도에 당황하지 않고 서핑보드를 잡은 채 바다를 느껴본다.


작년 고성에서


서핑에서는 항상 보드 위에서 일어서는 테이크오프만 중요하다고 생각했는데 강사님이 그건 중요하지 않다며 보드에 엎드려 파도를 느끼는 연습을 먼저 하라고 하셨다.  


테이크오프를 위해 일어설 때는 바다에 빠지면 매 순간이 실패인데 파도를 먼저 느끼라는 강사님을 만나니 바다에 빠져도 괜찮았다. 몸을 일으키려고 할 때마다 서야 한다는 부담이 줄어들어 바다와 파도에 대한 두려움이 사라지는 기분이다.


서핑을 고작   하지도 않고 너무 못한다고 자책했는데 생각해 보니 내 몇십 년 인생  서핑한 시간은 고작 몇 시간밖에 되지 않았다는 걸 자각했다. 일 년에 한두 번 해보고 안 된다고 좌절감을 느꼈다니. 강습받던 어느 그룹에 가도 제일 못하다 보니 그런 기분이 들긴 했다.


나이 비슷한 후배도, 동갑인 남편도 잘하는 걸 보면 나이 탓도 아닌거 같고 타고나길 균형감각이 없는 건가 답답했었다.


하지만 처음부터 멋지게 보드 위에 척하고 서는 사람들과 비교하지 않으면 조급해질 이유도 없다.


이번엔 멋진 인증샷이나 테이크오프 성공했다! 는

뿌듯함 없어도 그냥 서핑했다,는 것만으로도 만족스러웠다. 


잘하려고 하지 않으니 파도를 조금이나마 즐길 수 있게 됐다.


완도에 가기 전 한 번 더 서핑하러 가보고 싶다.


평소 걷기도 힘들어하는 내가, 서핑 다음 날이면 온몸이 부서질 듯 아프지만 이 과정을 지나 파도 위를 자연스럽게 올라탈 때의 기분을 생각하며 어느새 서핑 강습 예약 사이트를 뒤적이고 있다.


나의 삶 역시 파도에 저항하지 말고

자연스럽게 흐름을 탈 수 있기를 바라본다.


올해 고성 바다와 서핑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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