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갓집은 초가삼간이었다. 이엉으로 덮은 정도까지는 아니고 초가삼간 토대에 요케조케 보수해서 외할아버지랑 할머니가 내내 살았다. 낮고 어두컴컴한 집이었지만 여름엔 시원하고 겨울엔 자그마한 방이 아늑했다. 외양간 바로 옆에 붙은 아랫방은 쇠죽을 끓일 때마다 불을 때어 불내 흙내가 고소하게 났다. 그 방도 어둡긴 마찬가지였지만 모두가 그 방을 좋아했다. 다만 여름엔 모기장이 없다면 어른이고 애고간에 모기한테 씹힐 각오는 단단히 해야 했다. 외할머니 몸빼를 목까지 올려 입고 모기 뜯긴 자리에는 소금물을 바른 지금 우리 애 정도 나이의 내가 여전히 기억난다.
여름 겨울 할 것 없이 외갓집에 갔었다만 뭔 재미로 갔는지는 모르겠다. 슈퍼는커녕 버스도 자주 들어오지 않던 동네였는데 지금은 맞은편 동네가 공단으로 천지개벽했고 외갓집 위로는 고속철이 지나간다. 그 맞은편 동네가 공단으로 개발될 때 발굴조사하여 끄집어낸 고대 유물들을 짜 맞추고 그리는 알바를 했었다. 아마 외갓집 동네도 사라진다면 수많은 고무덤들이 나올 것이다. 어쨌든 그래도 드나드는 버스는 여전히 적다.
재미있는 게 하나도 없는 외갓집이었지만 그냥 재미있었다. 한 가지 장점은 외갓집 동네에선 라디오주파수가 정말 잘 잡혀서 깨끗하게 나왔다. 박소현의 FM데이트를 들으려고 라디오까지 바리바리 싸서 방학이면 외갓집으로 떠났다.
물론 지금은 빈집이다. 외할아버지는 말년에 폐암이셨지만 생을 바쳐 일가를 일구어낸 초가삼간 늘 자기 머무르던 그 자리에서 와이프인 외할머니에게 작별을 고하고 영면했다. 외할머니는 치매로 요양원에 아주 잠시 계시다 돌아가셨고 빈 외갓집은 큰 외삼촌이 깨끗이 관리한다.
고향 오빠는 일상에 치여 아주 피곤하거나 고달플 때 꿈속에서 종종 외갓집을 간다고 했다. 허겁지겁 무언가에 쫓겨 외갓집 대문까지 다달아 나지막한 집에서 나오는 희미하고 작은 불빛을 보는 순간 안도하며 깬단다. 그 작은 불빛이 주는 안도감을 알기에 성인으로 살기 빡빡할 때 나도 외갓집에 가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