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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빙수 Feb 14. 2020

맘모스빵

아내가 구워낸 추억.

나는 어렸을 적부터 빵을 좋아했다. 아침으로 밥을 먹는 일이 드물었고, 버터나 잼을 바르는 것을 좋아하는 것도 아니라 식빵, 모닝빵, 크로와상 등을 전자레인지에 살짝 따뜻하게 데우기만 해서 먹고 하루를 시작하곤 했다. 특히나 추운 겨울날이면 너무 뜨거워서 처음엔 달콤한 것도 잘 모르겠는 코코아 한 모금에 입 안의 빵이 녹아가며 비로소 입 안에 달콤함과 따스함이 퍼져가는 것이 좋았다. 요즘이야 빵, 과자, 케익, 등 종류도 어마어마하고, 각 분야마다 장인들이 운영하는 크고 작은 전문점도 많은데다 홈베이킹이 하나의 커다란 문화로 자리 잡았지만 어릴 때는 크라운 베이커리, 서울로 이사 온 다음에는 파리바게트, 가끔은 뚜레쥬르, 드물게는 시장 빵집, 그 정도가 내 빵 세계의 전부였다. 간식으로도 빵을 아주 좋아했는데, 신라명과의 '마드레느'는 단연 그중 최고였다. 지금의 그 조개 모양의 폭신폭신하고 부드러운 '마들렌'을 의미한 것이었겠지만 사실 '마드레느'는 그와 조금 달랐다. 딱 손가락 정도의 형태로 하나, 하나 과자처럼 비닐로 포장된, 마들렌이라고 하기엔 조금 밀도가 높아 카스테라에 더 가까운 질감을 가진 빵. 그 낱개 포장된 녀석을 아주 오랜 기억에는 서른 개, 조금 지나서 스무 개, 더 지나서는 열개 들이로 팔곤 했다. 한 자리에서 다섯 개씩, 여섯 개씩 하나, 하나 까서 먹고 있으려면 목이 메었는데, 평소 별로 좋아하지도 않는 우유가 이때 그렇게 맛있을 수가 없었다.


그 시절엔 누군가의 집에 놀러 가면 자주 빵을 사 갔다. 연말엔 친구네 집에 롤케익 -- 한 바퀴도 채 말리지 않는 시트 안쪽으로 생크림이 한가득한 도지마 롤케익이 아닌, 얇은 잼과 크림 레이어에 가끔은 건포도가 더해져 여러 바퀴 돌돌 만 롤케익 -- 을 선물하기도 하고, 할아버지, 할머니 댁에 갈 때도, 친가는 리치몬드 제과점에서, 외가는 파리바게트에서 빵을 한 아름 사 가곤 했다. 이때 단골은 소보로빵, 단팥빵, 크림빵, 카스테라 등등. 소보로빵이야 맛있음이 보장되어 있었지만, 나에게 단팥빵은 첫 입을 베어 물고 나서야 판단할 수 있었다. 완전히 갈린, 달콤한 팥소가 들어있으면 좋아했지만, 팥알의 형태와 질감이 남아있고 덜 달되 팥 본연의 맛을 조금 더 살린 팥소는 좋아하지 않았다. 그래서 직접 매장에서 구워져 판매되는 단팥빵보다 아주 달콤하고 곱게 갈린 팥소가 들어가고 위에 작은 호두 조각이 장식되어 있는, 기억으론 6개씩 두 층으로 포장되어서 공장에서 출하되는 미니 단팥빵을 좋아했다. 이는 파리바게트에서는 '엘핀 단팥빵'이란 이름으로 판매되었다. 그런가 하면 그 당시의 크림빵엔 버터크림이 들어간 경우가 많았다. 아마 실온에서 보관할 수 있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 휘핑/생크림이야 숟가락으로 퍼먹을 정도로 좋아하지만, 그때도 지금도 버터크림은 그 기름진 맛이 영 별로다. 그래서 크림빵은 주로 어른들의 몫이었다.


나에게 빵에 대한 기억은 끝도 없고, 아내는 아내 나름대로의 추억들이 있을 테다. 그러나 아내는 기본적으로 나보다 빵을 덜 좋아했어서, 내가 빵을 식사로 먹는다는 것이나 디저트를 그토록 애정 하는 것을 신기해했다. 자신이 아는 남자, 나아가 사람들 중 나만큼 케익을, 빵을, 과자를, 마카롱을, 아이스크림을 좋아하는 이는 거의 없는 것 같다고 했다. 빵이나 이것저것 디저트를 먹는 것을 좋아하는 만큼 나는 시간을 내어 간간히 직접 구워보기도 하였는데, 아내는 자신이 아무리 요리를 많이 해도 베이킹을 할 일은 없을 거라는 얘기를 종종 했다.


그런데!


워낙 빵과 디저트를 좋아하는 나의 색깔에 아내가 점점 물들어갔다. 데이트 초기엔 케익 두 개를 시키면 내가 한 개 반쯤 먹었다면, 언젠가부터 케익 세 개를 시켜서 둘이 반반 먹게 되었다. 도넛이 뭐가 맛있는지 모르겠다던 그는 이제 애플 프리터를 너무나 좋아하는 사람이 되었다. 내가 굽는 바게트와 비슷한 주식용 빵들을 나보다도 더 좋아해 주는 사람이 되었다. 그러더니 어느 날 스콘을 굽더니, 그 이후로 그는 폭발적으로 아주 다양한 것들을 구워내기 시작했다. 내 생일이라고 당근 케익을 만들어주질 않나, 반죽을 튀겨서 꽈배기, 그리고 찹쌀도넛을 만들어주질 않나, 얼그레이 무화과 케익, 모찌, 떡, 슈, 쿠키 등등 별의별 디저트를 만드는 모습을 볼 때마다 절대로 베이킹을 하지 않겠다고 그렇게나 당당하게 얘기하던 그의 모습이 눈앞에 막 떠오르며 웃음도 나고, 신기하기도 하고, 무엇보다 너무나 맛있고 고마운 것이었다. 그러다가 결국 큰 맘을 먹고 키친에이드 스탠드 믹서를 구매하게 되었는데, 나보다 아내가 더 좋아하는 것 같다. 이제는 나보다도 아내가 베이킹을 훨씬 많이 하고, 나에게 남은 건 아마 주식용 빵, 그리고 리에쥬 와플 정도밖에 없다. 그것도 아내가 하면 더 잘 하겠지만, 내가 집에서 만드는 흔치 않은 것들이라 나의 몫으로, 그에 대한 추억으로 남겨두고 싶은 모양이다.


그러던 어느 날 아내가 맘모스빵을 굽겠다고 했다. 빵을 그렇게 좋아한 것 치고 나는 이것에 대해 처음 들어보았다. 찾아보니 아주 거대한 소보로빵 안에 팥이나 앙금을 넣고, 그것 두 개 사이에 크림과 잼을 발라 샌드를 하는 어마어마한 형태를 가진 빵이었다. '추억의 빵'이란 상징에 비하면 직접적인 추억은 없지만 아내는 맘모스빵을 구웠고, 이는 이미 추억이 되었다.

일이 끝나고 집에 오니 어쩜 이렇게 고소한 소보로 냄새가 진동을 하던지. 나는 오븐의 냄새가 좋다. 그 열기의 냄새, 오븐에 남아있었을 이 전 베이킹을 했던 부스러기들이 타는 냄새. 


맘모스빵을 영접해 보니 정말로 큰 빵이었다. 이렇게 큰 빵을 본 적이 없다. 

아내는 전날부터 한참 준비해서 한 쪽은 팥 앙금, 한 쪽은 완두 앙금을 채워 넣었다. 어릴 때 완두콩을 싫어했던 기억이 있어서 시도해보기가 조금 두려웠으나, 먹어보니 팥과 또 다른 살짝 짭짤하고 고소한 맛이 좋았다. 그리고 색깔 대비가 예뻐서 눈이 즐거웠다.

그 사이에 잼을 바르고, 크림을 넣고, 이렇게 맘모스빵이 완성되었다, 한가득.

맘모스빵 구경온 올리. 맘모스빵의 크기는 올리보다 월등히 컸거나 적어도 그런 느낌이다. 소보로의 고소한 맛, 적당히 밀도 높은 빵의 식감, 팥과 완두 앙금의 달콤하고 고소한 맛, 그리고 맛있을 수밖에 없는 크림과 잼의 조화. 추억의 맛이라고 하기엔 클래시컬하게 언제나 먹어도 맛있을 수밖에 없는 조합이었고, 칼로리는 어마어마하겠으나 새삼 그게 뭐 어떤가 싶었다.


많이 남은 맘모스빵은 잘 챙겨서 그 주말 아웃도어에 볼더링을 하러 나가면서 들고 갔다. 어차피 에너지 소모도 크고 당분이 필요하니, 아웃도어 하러 갈 때 이렇게 베이킹을 해 두면 하이킹이나 볼더링 할 때도 큰 에너지원이 되고, 칼로리 걱정을 덜 하며 맛있고 달콤한 것을 먹을 수 있다.

한인마트에 갔더니 웬 엑설런트 아이스크림을 행사를 하고 있었다. 어릴 때 얼마나 좋아하던 아이스크림이었는지. 파란색, 금색 은박지로 낱개 포장되어 두 색깔이 미묘하게 맛이 달랐던 기억이 난다. 예전에는 하나가 아주 큰 느낌이었는데, 이제는 잘해 봐야 두 입 거리라 아쉽지만 여전히 맛있다. 추억의 빵 위에 추억의 아이스크림을 얹었다. 시간이 지나면 이 또한 추억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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