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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노 Dec 29. 2017

서서히 서서히 그러나 반드시

얼마 전, 김민준 작가의 ‘서서히 서서히 그러나 반드시’라는 책을 선물 받았다. 책의 가장 앞 장에 이런 말이 있어 적어본다. “청춘, 그건 비밀스러운 거야. 대부분은 미처 알지 못한 채로 지나치고 만단다.” 어른들은 항상 이렇게 말한다. “청춘일 때가 좋은 거야, 청춘일 때 외국도 나가보고 아르바이트도 하면서 고생도 해보고 그러는 거지.” 과연 우리는 우리만의 청춘을 보내고 있는 것일까.


‘취업=단춧구멍’. 사실 몇 년 전부터 너무도 흔한 말이다. 어찌 보면 ‘구멍’이라는 주제에 가장 일차원적으로 접근한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을 감수하고도 이 주제를 통해 나와 내 주변 사람들 이야기를 꼭 하고 싶었다. 25살, 군 제대 후 휴학을 1년 더 해서 곧 4학년이 되고 주변 친구들은 대부분 취업준비 중이다. 물론 이 중에는 대기업 취업에 성공한 친구도 있지만, 솔직히 아직 나는 취업 시장의 현실이 실감 나질 않는다. 남들이 좁은 단춧구멍에 들어가려고 본인을 깎아내고 다듬는 것처럼 나 또한 흉내는 내고 있지만 사실 이게 맞는 것인지도 모른다.


얼마 전 13년 지기 친구가 300 : 1의 높은 경쟁률을 자랑하는 N사 인턴 최종 3명으로 뽑혔다. 사실상 웬만한 기업의 취업보다 높은 경쟁률을 뚫었지만, 결과부터 말하자면 최종 1명으로 뽑히지 못했다. 친구가 말하길 이런 일도 있었다고 한다. 우리 말로 PT 발표 를 하던 중 누군가가 발표를 끊고 지금부터 영어로 하면 가산점을 주겠다고 말이다. 준비한 것도 까먹을까 발표는 그대로 진행됐고 이는 나머지 사람들보다 마이너스 요인으로 작용했을 것이다. 이 이야기를 듣고 든 생각은 우선 그 평가관의 태도가 굉장히 무례 했다고 또한 그 모든 걸 알면서도 우리는 그와 같은 요구에 무의식적으로 무조건 맞춰야 만한다는 것이었다. 또 다른 친구는 경찰 시험을 준비 중이다. 지난해 최종면접에서 탈락하는 아쉬움을 거두고 9월 필기시험을 다시 치러냈다. 초등학교 때부터 장래희망 칸에 경찰이라고 적었던 친구가 점차 그 길의 끝을 향해 달려가는 듯하다. 노량진에서의 1년을 보내고 지금은 독서실에서 공부하는 이 친구를 비롯해 많은 사람이 공무원 시험을 준비 중이다. 이미 정해져 있는 크기의 단춧구멍에 여러 개의 단추가 각자의 첫 단추를 잘 끼우기 위해 노력 중인 것이다. ‘첫 단추를 잘 끼우다’ 라는 표현이 극소수의 사람들에게만 해당하는 것 같은 현실이 안타까울 뿐이다. 그러나 위에도 말했듯, 우리는 이 같은 현실을 거부할 수 없다. 현실에 대한 불만과 불평은 날이 갈수록 쌓이지만, 우리의 이성과 신체는 무지막지한 현실에 순응 중이다.


나 또한 방학을 맞이할 때마다 무언가를 하나 더 해야만 한다는 생각에 알 수 없는 초조함을 가지게 된다. 남들이 이미 가진 것에 대한 초조함 때문에 나도 모르게 토익 학원을 이른 아침마다 다니게 된 것인지도 모른다. 하루를 마무리할 때 느끼는 감정은 아무것도 하지 않은 하루에서 오는 편안함이 아니라 남들보다 뒤처졌다는 초조함이다. 청춘에 대한 의미의 경계도 모호해지고 있는 요즘, 그 어떤 명사의 도서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다른 세대를 살았고 환경 자체가 다른 사람들에게서 나오는 말들은 말 그대로 위로뿐이라 고 생각한다. 일본 작가 다자이 오사무가 그의 작품 ‘사양’에서 “사랑, 이라고 쓰고 나니, 그다음을 쓸 수가 없다”라고 말했듯 청춘도 마찬가지이다. 우리가 직시해야 할 현실은 몇 년째 단춧구멍의 크기가 잔인하리만큼 정해져 있으며 오히려 작아지고 있다는 것이다.


본래 단추와 단춧구멍은 따로 존재할 때 의미를 가지지 못한다. 하나의 구멍에 맞는 단 하나의 단추가 통과할 때만이 비로소 제 기능을 다 하게 된다. 세상에 기능을 못 하는 단 추는 없다. 우리는 모두 그 좁디좁은 구멍에 들어가려고 본인을 깎아내고 더하고 있지만, 분명한 사실은 어느 곳이든 각자를 위한 단춧구멍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프랑스어로 단춧구멍을 의미하는 ‘부토니에 (boutonnière)’ 는 그 구멍에 꽂기 위한 꽃장식이라는 뜻도 가진다. 우리가 몇 년째 이어지고 있는 현실을 바꿀 수는 없다. 단지 나를 포함해 우리가 모두 바라는 것은 어딘가에 나를 위한 단춧구멍이 꿰어지길 기다리고 있고, 하나의 화려한 부토니에로 완성되기를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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