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솔라 레미솔라시 레미솔라
초등학생 시절 교내 활동으로 가야금을 배운 적 있다. 교과서 속 이미지로만 접했던 가야금을 그때 실물로 처음 접했다. 피아노와 달리 12현 가야금에는 '도'와 '파'가 없다는 사실이 꽤나 흥미로웠다. 레솔라 레미솔라시 레미솔라. 어쩐지 리듬이 느껴지는 계이름이었다.
여린 손끝에 허구한 날 물집이 잡히고, 터진 자리가 아물라치면 굳은살이 배겨 손이 못 생겨지는데도 가야금 시간은 늘 재미있었다. 오히려 굳은살이 맷집이 되어 더 힘차게 현을 튕길 수 있어 고마웠던 기억이 난다. 굳은살은 일종의 훈장이었다. 하지만 물집이 잡혀 현을 제대로 튕기지 못하는 시기엔 어찌나 속상하던지.
당시 내가 가장 좋아했던 연주곡은 <산도깨비>였다. 오른손 새끼손가락을 악기 끝자락에 붙이고 엄지와 검지, 중지로 12개의 줄 위를 노다니며 "덩 기덕 쿵 더러러러 쿵 기덕 쿵 덕!" 하는 부분을 다 같이 육성으로 외칠 때면 알 수 없는 희열이 느껴졌다. 나아가 곡 후반의 '걸음아~ 날 살려라~' 하는 하이라이트 구간에서는 도파민이 가득 뿜어져 나왔다. 여러 번 반복해도 지겹지 않은 그저 즐거운 시간. 그 시간이 쌓이고 쌓여 우리는 이 곡으로 학예회 무대를 준비하게 되었다.
활동 수업의 경우 매년 가을에 열리는 학예회에 공연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다. 무더운 여름 방학이 끝나고 2학기가 시작되자 공연을 위해 합주는 더욱 본격적으로 이어졌다. 어린 시절 나는 무대에 올라가는 걸 워낙 좋아했기에 늘 학예회가 기다려졌다. 그 시절 초등학생에겐 가을 학예회가 지금의 연말 K-pop 무대나 다름없는 상징적인 존재였다.
그런데 무대에 오르려면 특별한 의상이 필요했다. 아무래도 악기가 가야금이다 보니 한복을 준비해야 했는데, 각기 다른 디자인의 개인 소장품 대신 인근 한복점에서 판매하는 동일 디자인의 맞춤 한복이 필요했다. 저고리 아래가 길게 내려온 분홍 당의에 빨간 치마, 그리고 댕기까지 한 세트였다. 지금 생각하면 전공 교육도 아니고 고작 방과 후 활동으로 오르는 일회성 무대에 무슨 맞춤 의상까지 사비로 제작하나 싶지만, 그 시절엔 지방 소도시에서 의상을 대여해 주는 곳이 마땅치 않았다.
슬슬 공연일이 다가오자 친구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의상을 마련해서 입고 왔다. 커다란 쇼핑백에 곱게 개인 옷을 꺼내어 보란 듯이 입어보일 때면 나도 어서 내 것을 장만하고 싶었다. 하지만 엄마는 터무니없는 소리 말라며 그냥 있는 한복 가져가서 입으면 된다고 옷장 속 내 한복을 가져가라고 했다. 키가 커서 이미 작아진 그 옷은 친구들처럼 당의 저고리도 아니었고, 길게 늘어지는 옷고름 대신 꽃봉오리 똑딱이가 달린 위아래 같은 색상의 꽃분홍 한복이었다. 그럼 댕기라도 사 주라 했더니 엄마는 더 이상 대답하지 않으셨다.
그러던 어느 날, 본격적인 공연을 앞두고 리허설을 진행하기 위해 엄마들이 삼삼오오 모인 날이 있었다. 메이크업 도우미로서 와 주신 거였는데, 아마 꼭 하루는 아니고 여러 날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엄마가 없던 날의 기억도 존재하는 걸로 보면 말이다. 아무튼 어느 하루는 우리 엄마도 그 자리에 있었다. 평소 학교에 잘 오려하지 않았던 엄마이기에 나에게 그날은 아주 특별한 하루였다. 친구 엄마가 아닌 우리 엄마에게 얼굴을 내밀고 분장을 받았다. 그날만큼은 도란도란 다정한 모녀들 틈에서 나도 외롭지 않았다.
하지만 엄마는 그날 가슴에 비수가 꽂혔다더라.
한참 내 얼굴을 꾸며주고 있는데, 옆에 있던 어느 모녀의 대화소리가 들리더란다. 다들 같은 의상을 입고 있는데 나만 꼭 다른 걸 입고 있으니 그 모습이 의아했던 한 어머니는 당신 자식에게 '왜 쟤만 옷이 다르냐'라고 물었고, 그 아이는 "몰라, 선생님이 쟤 예뻐하나 봐"라고 답했단다. 대답의 뉘앙스가 어땠는지는 나도 전해 들어서 모른다. 하지만 엄마는 그 말이 그리고 서글프게 박혔단다. 엄마는 그날 연습이 끝나자마자 나를 한복 가게로 데려갔다. 아무것도 모르는 나는 그저 나도 다른 애들처럼 '그 한복'을 가지게 되었다고, 꿈이 이루어졌노라고 즐거워했더랬다. 그 빨간 치마가 엄마의 피눈물이었는 줄은 꿈에도 모르고.
마침대 공연 당일. 나는 다른 아이들과 똑같은 차림으로, 같은 노래를 부르고, 같은 장단을 외치고 내려왔다. 그날의 기억이 여전히 새빨갛게 선명하다. 오랜 시간이 흘러도 그날의 잔상이 지워지지 않을 만큼 행복했더랬다. 그렇게 가야금 교실을 얼마쯤 더 다니다가 자연스럽게 그만두었다. 흥미가 식었는지 해당 교실이 폐쇄되었는지 정확히 기억은 나지 않지만, 더 이상 가야금을 배우지 않아도 그 한복은 계속해서 꺼내 입었다. 명절이나 학교 행사 등 한복을 입을 날이 있을 때면 난 이 옷을 가진 데 행복을 느꼈다. 훗날 옷이 작아져 입을 수 없게 될 때까지 난 엄마 가슴에 꽂힌 비수를 알아채지 못했었다. 엄마는 아주 오랜 시간이 흐른 뒤에, 그 옷이 추억 속에 묻혀 멀리멀리 떠나고 나서야 이 이야기를 내게 들려주었으니까.
처음 들었을 땐 심장이 철렁했다. 나의 기쁨이 누군가에겐 슬픔이었다는 반전에 약간 허망하기도 했다. 나를 부단히 행복하게 만들었던 무언가가 한순간에 서글픈 상징물로 전락한 기분이었다. 이젠 그 한복만 떠올리면 눈물이 난다. 엄마도 그땐 기껏해야 서른 몇 살이었을 텐데. 키만 컸지 속은 아직 영글지 못한 딸자식 손을 잡고 한복 가게로 향하던 그 마음이 오죽했을까.
그러나 달라지는 건 없었다. 시간은 흘렀고, 내게 남은 기억은 잠깐의 슬픔에 얼룩졌을지라도 종국엔 행복했다. 그날 그 한복집의 풍경과 내 몸에 꼭 맞는 한복을 손에 쥐던 감촉과 귀가 후 다시 입어보던 방 안의 공기를 난 여전히 기억한다. 기어이 그 옷을 입고 무대로 향하던 날의 기쁜 발걸음 또한 선연하다. 눈을 감고 그때로 돌아간다면 그날의 나는 항상 웃고 있다. 어린 엄마의 눈물을 마신 줄도 모르고 환히 웃었다. 물론 엄마가 내게 주고 싶지 않아 그런 게 아니었다는 걸 이제는 안다. 당신의 모든 걸 꺼내주고파도 녹록지 않은 현실 앞에 모질어졌어야 한다는 걸 이젠 너무나 잘 안다. 그랬기에 그 한복이 나는 더더욱 소중해졌다.
비록 '도'와 '파'가 없는 행복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의 그 시절은 아름다운 멜로디였다는 걸 엄마가 알아주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