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안해하지 말라는 모순에 대해
사회 전반에 비정상적인 현상들이 일어나고 있다.
아니 어쩌면, 아주 생소한 일들은 아닐 것이다. 간혹 발생했던 엽기적인 사건들이 한 시기에 연쇄적으로 터지면서 공포감을 더하는 듯하다. 묻지마 칼부림, 성폭행, 학부모 갑질, 전세사기 등. '경기가 안 좋아서'라는 간편한 핑계가 통하지 않을 정도로 인간성이 상실된 사건들이 매스컴을 통해 전파되고 있다.
왜 우리나라에 유독 이런 희한한 일들이 일어나는 걸까? 그리고 왜 지금 시점에 이런 일들이 터진 걸까?
근본적으로 보면, 사람들의 ‘불안’도가 높아졌기 때문이다. 시대마다 또 나라마다 급격한 경제적 성장을 이룬 후에는 뒤탈이 나곤 한다. 모두가 못 사는 시절에는 오히려 불안도가 높지 않다. 아이러니하게도 자원이 풍부할수록 자유가 보장될수록 사람은 불안해지는 존재다.
우리가 현재의 모습이 아닌 다른 모습일 수도 있다는 느낌, 우리가 동등하다고 여기는 사람들이 우리보다 나은 모습을 보일 때 받는 그 느낌. 이것이야말로 불안의 원천이다.
-알렝드보통, '불안' 중
그렇다면 한 사람을 엄청난 괴물로 만들 수 있는 강력한 힘을 가진 이 '불안'의 근본은 무엇일까? '불안'에게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실제로 불안장애를 겪는 대다수가 약물을 사용하지 않고 불안을 극복한 경험이 없다고 말한다.
심리 전문가도 해결하기 어려워 하는 '불안감'에 대해 비전공자인 필자가 감히(?) 분석해보고자 한다.
불안은 어디서 온 걸까?
그렇다면 우리는 왜 이렇게 불안해진 걸까?
이미 오래부터 '불안'에 대해 연구했던 알랭드보통은 그의 서적에 불안을 일으키는 역사적, 심리적, 철학적인 요인들을 정리해 놓았다. 그의 분석에 의하면, 사람은 환경에 매우 약한 존재이며 불안의 원인들은 대부분 개인의 환경로부터 기인한다. 그리고 과거나 현재나 사회적 불안이 고조되는 분위기에서 (다른 양상으로 나타날 뿐) 비이성적인 문화는 지속적으로 형성되어 왔다.
알랭드보통이 정의한 불안의 내외부적 원인은 ①사랑 결핍 ②속물근성 ③기대 ④능력주의 ⑤불확실성 이렇게 다섯 가지로 구분된다. 해당 서적을 읽어보지 않았어도 충분히 공감할만한 불안의 소스들이다. 19세기뿐만 아니라 오늘날에도 적용이 되는 현상들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들은 모두 메슬로우의 욕구 5단계와도 연관성이 있다.
종합해 보면 불안은 '욕구불만'에 의해 발생된다.
애정과 관심에 결핍을 느끼는 건 소속과 인정의 욕구가 불충족된 상태와 상응한다. 그리고 결핍에 따른 불안이 표현되는 양상도 유사하다. 태어날 때부터 자신의 가치에 의심을 가지게 되는 게 인간의 본성이다. 그렇기에 사랑에 대한 결핍이 강할수록 자신을 좋게 봐주게끔 좋아 보이는 그룹에 소속되고자 그리고 더 많은걸 성취(능력주의)하고자 노력하게 된다. 이때 불안의 뿌리는 '사랑받고 싶은 욕구'가 된다.
나아가 시대의 분위기에 따라, 사회가 요구하는 조건을 충족하지 못하면 수치심과 모욕감에 사로잡히기도 한다. 알랭드보통은 사회가 불평등할 때는 지위에 대한 의문이 없고, 자신의 지위가 달라질 거라는 기대가 없었기에 오히려 영혼은 타락하지 않았다고 말한다. 이렇게 때로는 욕망에 대한 자유가 불안의 촉진제가 된다.
마지막으로 '불확실성'은 안전욕구와 관련이 있다. 살아가면서 깨닫는 진리 중 하나는 인간이 통제할 수 있는 것은 많지 않다는 것이다. 아무리 잘 살아왔어도 날아오는 돌멩이 하나로 생을 마감할 수 있는 게 인생이다. 그리고 매스컴이 발달할수록 확률이 적은 일이라도 나에게 충분히 일어날법한 일로 와닿기 때문에 우리는 항상 외부 환경에 대한 불안에 노출되어 있을 수밖에 없다.
"불안해하지 마"라는 모순적인 위로
'불안'이라는 감정을 반기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불안'은 부정적인 감정이라는 이미지를 가지고 있다. 그렇기에 누군가가 불안감을 토로하면 "불안해하지 마"라는 다소 식상한 위로를 건네어본 적이 있을 것이다. 이미 불안한데 불안해하지 말라니. 불안해하는 상태마저 억압하게 만드는 문화라고 보인다.
그렇다면 불안을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이 있을까? 미리 답하자면, 없다.
때로는 불안감을 해결하기 위하여 사주팔자를 보기도 한다.
알랭드보통도 기독교를 포함한 종교를 통한 해결 방법을 제시했다. 거시적인 시각으로 인생을 바라보면 미래에 대한 불확실함이 어느 정도 해소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신을 포함한 타인의 몇 마디 말로 인해 불안이 근본적으로 해결될 수는 없다. 만약 그렇게 간단히 해결이 가능했다면 종교 내 분열과 전쟁이 이만큼 자주 있지 않았을 것이다.
또한 많은 심리 전문가들은 '실천'을 강조한다.
미래에 대한 불안을 실행을 통해 직면한다면 어느 정도 해결할 수 있다. 어쩌면 가장 현실적인 조언이다. 다만 이 방법은 단기적으로 효과가 있을 뿐 불안은 본능처럼 다시금 피어오를 수 있는 감정이다. 흔히 '성공하면 불안해할 일이 없을 거야'라고 생각하지만 이 희망 또한 파랑새를 쫓는 일과 같다. 많은 것을 성취하고 부족한 없이 가졌다고 할지라도 불안감에서 해방되지 못한다. 왜냐하면 그토록 원하던 소망을 이루면, 어렵게 가지게 된 것들을 잃을 수 있다는 새로운 불안감이 피어오르기 때문이다. 때로는 이룬 것이 많을수록 약점이 많아지기 마련이다.
불안감은 관리해야 하는 감정
불안을 없애는 근본적인 처방 방법은 없다. 어차피 떠안고 살아야만 한다면, 우리는 불안이라는 감정에 다르게 접근 볼 필요가 있다. 사람은 항상 불안할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점을 아는 것만으로도 덜 불안해질 수 있다. 나아가 천방지축 악당 일지라도 나의 아군으로 만든다면 꽤 쓸모 있지 않겠는가? 불안이 가진 엄청난 힘을 나를 성장시키는 방향으로 사용한다면 어떨까? 다행인지 사람은 행복을 좇기보다 고통을 피하는 데에 더 열정적으로 힘을 발휘한다. 불안감은 변화의 좋은 재료가 될 수 있다.
그렇기에 불안한 마음이 나를 덮치기 전에 역으로 불안감을 '관리(training)할 줄' 알아야 한다. 왜냐하면 '불안'은 내 마음속 자아가 알려주는 중요한 시그널이기 때문이다.
>>다음 화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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