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isode 2. 아홉수
나는 27살까지 남자에게 차여본 적이 없었다.
연애에 있어서 아쉬운 입장에 있어본 적도 없고, 연애가 나의 앞길에 발목을 잡은 적도 없었다. 가끔 친구들의 연애 상담을 해주면 공감이 안 갈 때가 더 많았다. 왜 꼭 저 남자여야 할까? 왜 남자도 많은데 굳이 재회를 하려고 할까? 등의 의문부터 들었기 때문이다(참고로 필자는 F다).
물론 나도 가슴 아픈 첫사랑을 해봤다. 그러나 헤어질만했으니 헤어졌다고 생각했고, 이미 끝난 사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기까지 큰 어려움은 없었다.
그렇게 쿨병에 걸려있던 내가 28살에 보낸 카톡이다. 입사 1년차에 처음으로 남자친구에게 이별 통보를 받고서 '*인과응보'라는 말을 믿게 되었다.
*인과응보: 행위의 선악에 대한 결과를 후에 받는다
과거에 내가 매정하게 끊어냈던 X들이 파노라마처럼 머릿속을 스쳤다. 일방적으로 이별을 당하는 게 얼마나 비참한 건지 20대 후반이 돼서야 알게 되었다. 모든 삶의 의욕을 잃은 듯했다. 밥이 안 넘어가서 살이 4kg가 빠졌고, 잠도 제대로 못 잤다.
약 1년의 질풍노도 시기를 지나 깨달은 바가 있다. 바로, '20대 후반'에는 누구나 연애고자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사람마다 생애주기별로 커지는 욕구들이 다르다. 그리고 (결혼 의사가 있는)많은 여성들은 주로 20대 후반 30대 초반에 결혼에 대한 욕구가 커진다. 이유는 간단하다. 그게 인간의 본능이기 때문이다. 여자는 번식의 때가 한정되어 있어서 남자들보다 결혼과 출산에 대한 욕구가 더 빨리 커질 수밖에 없다.
여기서 문제는 결혼에 대한 욕구가 클수록 연애의 약자 입장에 서기 쉽다는 사실이다. 이건 남녀노소 마찬가지다. 간절할수록 결혼을 하고자 하는 상대에게 집중하게 되고 맞춰주려고 한다. 그러다 보면 자연스럽게 자신의 매력은 억제되고 연애 관계에서 '을'의 입장이 된다. 이렇게 그동안 연애를 잘해오던 사람도 20대 후반이 되면 연애고자가 될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나이의 특수성을 감안한다고 해도 나의 방황은 정도가 지나쳤다. 주변을 봐도 나만큼 결혼에 눈이 돌아가 있는 사람은 찾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오랜 세월이 지나 '내가 왜 그렇게까지 결혼을 하고 싶어 했을까?'에 대해 분석해 보니,
경제관념이 없다
28살에 나는 '금리'라는 단어도 낯설어하던 금융 문맹이었다. 그래도 돈 좀 번다는 대기업에 입사했는데 나의 생활 수준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고, ‘부자가 되려면 재테크에 관심을 가져야 하나’ 고민을 하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 동창회에서 전문대학원으로 편입했던 친구들을 만났다. 약사, 의사, 회계사 등 고소득 전문직의 길을 가고 있는 동기들을 보면서 애써 질투심을 숨겼다.
당시에 나는 코스피가 뭔지도 모르는 경제고자였기 때문에 근로소득이 나의 경제적 자존감을 결정하는 유일한 지표였다. 회사에서 일을 제대로 하고 있는 것도 아닌데 어떻게 하면 나의 자존심을 지킬 수 있을까 고민을 했다.
내 나름의 해결책이었던걸까? 이후 나는 본능적으로 돈을 많이 벌 것 같은 직군의 남자들을 찾았다. 얼른 나의 이 경제적 무지를 가려줄 경제적 파트너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기대와 달리 입사 2년차까지 나의 연애고자 패턴이 반복되었다.
2021년(입사3년차) 제야의 종소리를 들으면 나는 새로운 다짐을 해봤다. '어차피 연애도 드럽게 안되는데 재테크해서 스스로 부자나 되야겠다'라고 말이다. 그렇게 나는 한 해 동안 경제 서적 50권을 읽으며 공부했고, 2년 뒤(현재) 원금의 45% 이상의 금융 수익을 벌고 있다.
수익률보다 나를 놀라게 한 사실은, 경제공부를 시작하고서 더 이상 연애 상대를 찾지 않게 되었다는 것이다. 또 무엇보다 '남자 보는 눈'이 선명해졌다. 옛날에는 소개팅에 나온 남자가 주식 얘기만 하면 눈에 하트가 그려졌었다. 내가 모르는 경제 상식을 아는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만의 경제관념이 잡히니 소개팅남의 연봉보다는 가치관과 인성 등 '사람 자체'를 보려는 여유가 생겼다.
경제공부가 나를 드라마틱하게 변화시켰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다만, 자기만의 경제 가치관이 없을 때 사람은 타인(가족, 배우자, 친구 등)에게 더 의존하게 된다는건 확실했다. '돈'에 대한 지식은 실물 자산뿐만 아니라 내적 자산까지 채워주는 가치를 가졌다. 누구든 20대 후반을 앞두고 있다면 자기만의 경제관념을 갖기를 강력하게 추천한다.
소속감이 없다
2019년 이별 당시, 나는 '그를 너무 사랑했기 때문에' 이별에 대한 상실감이 컸다고 믿고 었었다. 그러나 그와 헤어지고 3개월이 지난 뒤 나의 사고와 감정이 점점 이상해졌다. 헤어졌던 X들에 대한 그리움이 갑자기 커진 것이다. 얼마 전 헤어졌던 X를 제외하고 나를 가장 사랑했던 X가 미친 듯이 보고 싶었다.
7년이 지나서야 다시 사랑이 불타올랐다고 보기에는 말도 안 되는 상황이었다. 뒤늦게 X에 대한 추억들에 잠겼다가 겨우 이성이 돌아왔을 즈음, 나는 내 마음에 병이 생겼음을 감지할 수 있었다.
나는 기댈 수 있는 누군가에게 소속되고 싶었던 것이다. 학창 시절부터 회사에 입사하기까지 나는 한 번도 소속이 없었던 적이 없었다. 학교, 대학원, 동아리 등 나를 소개할 소속이 있었고 그 안에서 안정감을 느꼈었다. 그런데 어렵게 쟁취한 '회사'라는 울타리에서는 소속감 대신 불안함을 크게 느꼈고, 이 불안정함을 해결해 줄 '누군가'가 필요했던 것이다. 이왕이면 '결혼'이라는 새로운 도피처도 되어줄 수 있는 '남자친구'라는 이름으로 말이다.
격한 운동을 하고 나면 목이 마르다. 땀으로 물이 많이 배출되어 몸에 물을 보충해야 하기 때문이다. 마음도 마찬가지다. 외부로 마음 쓸 일이 많을수록 마음에는 결핍이 생긴다. 마음 둘 곳 곧 따듯한 소속감이 필요해진다. 무조건적으로 나를 지지해 줄 사람을 찾게 된다. 그래서 마음에 상대방을 헤아릴만한 여유가 없을수록 연애에 목을 매게 되는 것이다.
취미가 없다
입사 1년차에 나는 취미가 없었다. 대학원을 다녀본 사람들은 알겠지만, 대학원생에게 취미는 있을 수 없다(어디 노예가 취미를?). 가끔 시간이 날 때면 친구들과 술을 먹거나 방에서 넷플릭스 보는 일이 전부였다.
그래서 나랑 언제든지 놀아줄 수 있는 남자친구가 필요했고, 함께 미래를 그려갈 배우자를 갖고 싶었다. 왜냐하면 나는 시간이 꽤 많았기 때문이다.
이별의 후유증을 자가치료 해보기 위해 심리학 서적들을 보기 시작했다. 어릴 적에는 그렇게 읽으라고 해도 안 읽던 책을 자발적으로 사서 읽게 된 것이다. 자발성의 힘인지, 그때 나는 내가 독서를 좋아하는 사람이었다는 걸 처음으로 알게 되었다.
주말마다 도서관에 가서 관심 가는 책들을 몽땅 빌려왔다. 일주일에 2-3권씩 시간 날 때마다 무아지경으로 읽었고, 자연스럽게 집에서 책을 읽는 주말이 소개팅이 있는 날보다 더 좋아졌다. 취미와 함께 매일 바쁘게 지나다 보니 점점 연애에 대한 갈증이 사라졌고, 그렇게 나는 과거의 안정적이었던 모습으로 천천히 돌아올 수 있었다.
없는 취미를 만들 필요는 없지만, 내가 무엇을 좋아하는지는 탐구하는 건 큰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취미가 없으면 시간에 공백이 커지면서 삶이 무료해지기 쉽기 때문이다.
좋아하는 게 생기면 이상하게도 마음에 안정감이 찾아온다. 그리고 깊게 취미 덕질을 할수록 마음에 활력이 생긴다. 번외로 소개팅 시장에서 73%가 취미가 있는 이성을 선호한다고 한다. 그만큼 취미 자체가 자신의 매력을 나타내는 수단으로도 사용될 수 있다.
막상 결혼을 해보니, 그토록 결혼이 고팠던 때에 결혼을 했었다면 99% 확률로 이혼을 했을 것이다. 그리고 이만큼 좋은 남편을 만나지도 못했을 것이다. 그 당시엔 죽을 만큼 괴로웠지만 지나고 보니 나에게 꼭 필요한 성장통이었다.
혹시나 요즘 마음에 큰 시련이 있는 독자가 있다면 인생을 길게 바라보라고 격려하고 싶다. 33년 짧은 인생사도 다채로운 새옹지마였다. 과거의 찌질함이 거름이 되어 꾸역꾸역 성장해 왔다.
나를 찼던 3명의 X들에게도 감사를 전한다.
너희들이 나의 최고의 연애 코치였다! 너네도 빨리 좋은 사람 만나서 결혼해라. 메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