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비니스 Mar 07. 2024

피해자가 총대까지 메야 하나요?

Episode 3. 직장 내 괴롭힘

2021년 10월 21일 22시.

느닷없이 카톡 알림이 울렸다. 발신자를 확인하니 또 그놈이었다. '이번엔 또 무슨 X소리를 했을까'하고 채팅창을 확인했다.


"힛"


잊을만하면 밤마다 이런 X소리를 전송하는 책임 한 명이 있다. 40대 중반에 애처가이자 딸바보라는 공적인 이미지를 가지고 있는 남자 책임이다. 늦은 시각 7살짜리 여자아이 사진(그놈의 프로필 사진)이 카톡에 뜨면 분노와 수치심이 치밀어 올랐다.


그렇다. 나는 직장 내 괴롭힘을 당하고 있었다.

입사 2년차 때부터 시작된 그의 연락은 무려 2년 동안 계속되었다. 2019년 중순 경력직으로 들어온 그는 초반에는 낯을 많이 가렸었다. 나와 사무실 자리가 가깝지도 않았고 담당하는 프로젝트도 겹치지 않아 말을 섞을 기회조차 없었다. 그러던 그가 느닷없이 2020년 초부터 저런 이상한 의성어를 카톡으로 보내왔다.


처음 X소리 카톡을 받고선 당연히 잘못 보낸 문자라고 생각을 했다. 예상대로 다음날 '미안해요, 다른 동명이인인 친구에게 보낸다는 걸 잘못 보냈어요'라는 연락이 덧붙여 와있었다. '그런가 보다'하고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그러나 머지않아 알 수 있었다. 그는 수많은 카톡 ID들 중에 '나'를 찾아 의도적으로 메시지를 보내왔다는 것을.


입사 초년생이었던 나는 초장에 그에게 경고를 하지 못했다. 나에게 있어서 최선의 대응은 '무시하기'였다. 이러한 나의 소극적인 대처가 그를 더 도발하게 만들었다는 걸 미처 몰랐었다.


그에게 겪었던 수많은 괴롭힘들 중 대표적인 3가지 사례들을 공개하고자 한다. 참고로 나는 1년이 다 되도록 이 상황이 '괴롭힘'인지를 자각하지 못했고, 내가 피해자임을 깨닫기까지 2년이 걸렸다.


피해 일지

2020년~2021년 : 술만 쳐먹으면 카톡을 보내온다 (총4회)

"힛", "잉", "얌ㅠㅠ"

그가 X소리 카톡을 보내면(위는 실제로 그가 보낸 카톡 내용이었다), 다음날에 오피스에서 항상 들리던 말이 있었다.


"김책임, 어제 집에는 잘 들어갔어?"

*그놈=김책임


아니나 다를까 회식 자리에서 만취를 한 것이다. 그렇게 거하게 취한 중에 나한테 카톡 할 정성이 있었다는 사실이 나를 매번 소름 끼치게 만들었다. 어디다 하소연도 못하고 행여라도 그와 마주칠까 고개를 푹 숙이며 다녔다. 피해는 내가 입었는데 내가 애를 써서 도망 다니는 꼴이었다.


그는 처음 한 두 번 '잘못 보냈다'라는 카톡을 보내오다가 이후에는 아예 변명조차 안 했다. 얼마나 나를 쉽게 봤으면.. 그러나 그에게 따지고 싶지도 않았다. 왜냐하면 얼굴을 보기도, 말을 섞기도, 메신저를 보내고 싶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그냥 무시했다. 계속 무시하면 알아서 나가떨어질 줄 알았다.


2020년~2022년 : 같이 회식한 날이면 귀가 중 카톡을 보내온다 (총3회)

어쩌다 그와 같은 회식 자리에 가게 되는 날이면, 나는 무조건 그에게서 가장 멀린 떨어진 자리에 앉았다. 회식 분위기가 무르익어도 정신을 바짝 차리고 일정 거리를 유지했다. 회식이 끝날 때까지 나만의 미션을 수행하고, 몰려오는 피곤과 함께 집으로 귀가하고 있는데..


"집에 잘 들어갔어?"


라는 카톡 메시지가 떴다. 그 당시 나는 남자친구가 없었다. 그렇다면 누가 이런 멘트를 날리는 것일까? 맞다. 그놈이다. 무려 3번이나 이 소름 돋는 문장을 보내왔다. 이 시점부터 나는 그의 번호를 차단을 했다. 하지만 그는 X소리를 멈추지 않았다.


2021년~2022년 초 : 내가 출장을 가면 사내 메신저를 24시간 보내온다 (2주 동안 매일)

3년차에 보름간 지방으로 출장을 갔었다. 출장지에 가면 워라밸은 붕괴된다. 작업이 끝나는 시간이 곧 퇴근시간이기 때문이다.


안 그래도 바쁜 와중에 프로젝트 생산업무에 큰 이슈가 생겼었다. 트러블슈팅에 애를 먹고 있다가 잠시 쉬는 시간에 노트북을 켜서 메일함을 확인했다. 그런데 화면을 켜자마자 이메일이 아닌 사내 메신저 알람이 울렸다. 평소 메신저를 잘 사용하지 않던지라 이상하다 생각하며 창을 열었는데..


“이슈 터졌다며, 괜찮아?”


소문이 그놈 귀까지 들어갔나 보다. 카톡을 차단했더니 사내 메신저로 괴롭힘 루트를 변경했다. 무대응이 답이다 싶어 무시했다. 그러나 다음날 '또' 메신저가 와있었다.


“ㅠㅠ괜찮은 거 맞아?”


이 메시지를 지금 보니, 그놈은 혼자서 나랑 유사연애를 하고 있다는 망상에 빠져있던 것 같다. 나는 다시 연락하지 말라는 의미로 ”네, 바쁩니다“라고 대응했다. 거절의 뜻을 담은 메시지가 (머리가 나쁜 건지) 그놈에게는 대화를 허락한다는 신호로 잘못 전달이 됐나 보다.


그는 불굴의 의지로 메신저를 계속 보내왔고 나는 계속해서 몇십 통의 메시지들을 씹은 채 출장 일정을 마무리했다. 해방감을 느끼며 공항에 도착했을 때 문자메시지 알람이 울렸다.


“출장 잘 마무리 됐다며? 2주 동안 수고 많았고 서울로 잘 돌아가^^”


하.. 카톡 말고 번호부터 차단했어야 했는데..

출처: 대한민국 정책브리핑

수치스러움이 극에 달했을 때 나는 카톡에 남아 있는 그의 채팅창을 삭제해버렸다. 카톡창에서 그의 이름을 볼 때마다 치가 떨렸기 때문이다. 아무리 빡쳤어도 그랬으면 안 됐는데. 나중에 알았지만, 유일한 증거를 내 손으로 제거해 버려 피해자임을 입증하기까지 절차가 더 복잡해져 버렸다.


그럼에도 나는 영혼까지 끌어모아 용기를 내서 그를 신고했다. 용기의 대가는 어땠을까? 허무하게도 사내 교육에서 배웠던 피해자 보호 절차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직장 내 괴롭힘 현실판 피해자인 나는, 아주 찜찜한 피드백과 허울뿐인 보호를 받게 되었다. 


일을 크게 키워야만
보호받을 수 있는 정책이었다


2022년 1월. 나는 내가 겪었던 피해 사실을 공식화했다. 일을 키우는걸 극도로 싫어하는 내가 조직개편안을 보자마자 팀장님께 달려갔다. 하루빨리, 아니 일분일초라도 빨리 보고를 해야 조직개편안을 엎을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이 있었던 것 같다.


조직개편의 핵심은 나와 그놈이 같은 프로젝트를 맡게 될 거라는 내용이었다. 그의 번호를 차단하자마자 이런 재앙을 맞이하다니. 당장 막아야 했다.


팀장님과 오피스 옆 회의실에 들어가 대화를 나눴다. 침착하게 말하고 싶었지만 이미 내 눈은 눈물범벅이 된 상태였다. 말을 하는데 손이 너무 떨려서 테이블 밑으로 손을 감췄다. 가쁜 호흡으로 한마디 한마디를 뱉을 때마다 팀장님께서 충격을 받으시는 듯했다. 그때 나도 실감이 났다. '내가 피해자가 맞았구나', '내가 당한 일이 놀랄만한 일이 맞구나'라고 말이다.


팀장님께서는 당장 담당 프로젝트를 바꿔주시겠다고 하셨다. 사실 이 말을 듣고 싶어서 팀장님을 찾아갔던 것이었기 때문에 더 이상 바랄 게 없다고 생각을 했었다. 그러나 그다음으로 하신 말씀이 또 다른 전쟁의 서막을 알렸다.


"그럼 이선임이 A 프로젝트(옆팀 프로젝트)로 이동하는 건 어떨까?"


잘못 들었나 싶었다. 내가 왜? 나는 입사 후에 이 프로젝트만 3년째 담당하고 있었다. 근데 무임승차한 그놈이 이 프로젝트를 날름 갖고 내가 이동을 하라고? 입사하고 처음으로 반기를 들었다. 나의 정당한 주장에 아차 싶었던 팀장님은 자기가 말실수를 한 것 같다며, 그럼 김책임(그놈)을 이동시키겠다고 말을 번복하셨다. 기분은 이미 상했지만 내가 원하는 대로 그와 분리시켜 주는 것만으로도 만족스러운 결과였다.


다음날 팀장님이 따로 나를 부르셨다. 인사이동 관련한 일이겠거니 하고 빠르게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팀장님의 첫마디에 나는 남아있던 애사심을 완전히 잃어버렸다.


"HR(인사팀)에 말을 해보니까.. 조직개편안이 이미 승인이 나서 수정이 어렵다고 하네.. 일단 한 달 동안만 같은 프로젝트에서 일을 하다가 바로 김책임을 타팀으로 발령을 내볼게요."


한 달 동안만? 나는 그놈과 한 시간도 같이 있기 싫은데 한 달이라니.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안 가는 피드백이었다. 내가 옆옆팀에서 조직개편이 하루아침에 엎어지는 걸 봤었는데 왜 안된다는 거지? 사유가 합당하지 않아서일까. 어이없는 표정으로 질문을 쏟아내는 나에게 팀장님은 총대를 넘겨주시면 말씀하셨다.


"인사 변동 사유가 직장 내 괴롭힘이라고 말을 하면 분명히 본부에서 조사를 나올 거야. 정식으로 사내 괴롭힘 관련한 절차가 시작될 텐데.. 괜찮겠어? 이선임이 원한다면 내가 대신 보고해 볼게"


직장 내 괴롭힘 가해자는 정도에 따라 정직 혹은 휴직의 징계가 처해진다. 그리고 피해자는 피해 사실을 규명하기 위해 담당자들과 수차례 인터뷰를 해야 하고 수많은 증거자료를 제출해야 한다. 상상만 해도 막중한 부담감이 나를 짓눌렀다. 나는 그저 나를 희롱하는 그놈을 차단하고 싶었던 것뿐인데 왜 내가 모든 수고를 짊어져야 하지?


결국
총대는 피해자가 메야한다


밤새 고민한 결과, 나는 그를 신고하지 않기로 했다. 그리고 그에게 처음으로 사내 메신저를 보냈다. 잠깐 휴게실로 나오라고. 궁지에 몰리면 초인적인 힘이 나오는가 보다. 나는 총대를 멘 뒤 갑옷을 입고 그와 마주했다.


"책임님. 경고하는데요, 저한테 앞으로 말 걸지 마시고 제 눈에 띄지 마세요. 안 그러시면 사내 직장 내 괴롭힘으로 신고하겠습니다."


그의 눈을 똑바로 보고 파르르 떨리는 입술에 힘을 주며 말했다. 그놈의 눈동자가 떨려왔다. 그래, 너도 니 죄를 알고 있었지? 그에게 받은 문자들이 얼마나 치욕스러웠는지, 내가 팀장님께 어디까지 말씀드렸는지도 차근차근 알려줬다. 내 말을 듣고 아무 말도 못 하는 모습에 어이가 없었다. 변명의 여지도 없을 짓을 왜 한 것일까? 그는 눈동자만큼이나 떨리는 목소리로 미안하다고 사과를 하고, 고개를 숙인 채 조기 퇴근을 했다.


그를 신고하려면 나는 우선 카톡 복구부터 해야 했고, 복구 비용은 20만원이 넘었다. 그놈 때문에 피 같은 내 돈을 쓸 수는 없었다. 이뿐만 아니라 사실 여부 확인을 위한 절차도 3개월가량 걸린다고 했다. 그러나 나는 단 하루도 그와 얽히고 싶지 않았다. 직장 내 괴롭힘 신고의 목적이 나를 지키기 위해서라면, 나는 그냥 내 주먹으로 그놈을 직접 패기를 선택했던 것이다.


그에게 경고 싸대기를 날린 다음날 오전 8시에 문자가 와있었다.


"네가 너무 밝아서 친해지고 싶었어. 그게 선을 넘었었나 봐. 너한테 너무 미안해서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나는 정말 장난이었는데.."


역시 X소리다. 지긋지긋한 X소리. 내가 밝은 거랑 니가 헛소리 하는 게 무슨 상관이니.




시간을 돌이킬 수 있다면, 나는 과연 그놈을 직장 내 괴롭힘으로 신고했을까? 증거 카톡들을 삭제하지 않고 가지고 있었다면, 신고를 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중요한 건 신고여부가 아니었다. 나는 처음으로 나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 누군가를 공격했다. 말로 총을 겨누고 쐈다. 평소 남에게 싫은 소리도 잘할 줄 모르는 내가 오로지 나를 위해서 처음으로 내린 강인한 결단이었다. 겪지 않았으면 더 좋았을 일이지만, 나는 몇 단계 더 성장했고 강해졌다.


아이러니하게도 만약 나의 가족이 직장 내 괴롭힘 신고를 하겠다고 한다면, 나는 말릴 것 같다. 짧게나마 피해자 신분으로 상위자에게 고발을 하고 피드백들을 받으면서 느낀점이 있기 때문이다. 바로 '묘한 배신감'이다. 당사자 외에는 그 누구도 책임지고 싶어 하지 않다는 일이 '직장 내 괴롭힘'이다. 어떻게든 연루되지 않으려고 관계자들이 입을 닫은 채 피해자 홀로 버티는 긴 싸움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만큼 사내 괴롭힘 신고는 큰 용기와 결단 그리고 후폭풍까지도 감당하겠다는 담대함이 필요한 일이다.


피해자에게 과도한 책임과 절차를 요구하는 신고 문화는 개편되어야 한다. 본질을 훼손하는 정책은 빛 좋은 개살구일 뿐이다. 직장 내 괴롭힘의 본질은 피해자를 보호하는 것이지 가해자를 처벌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 회사도 더 이상 ‘혁신'을 외치지만 말고 가장 중요한 HR부터 혁신이 이루어졌으면 좋겠다.

이전 03화 20대 후반에 연애고자가 되는 메커니즘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