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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비니스 Jul 30. 2024

둘째의 참을 수 없는 애매함

Episode 4. 내가 관종이 된 이유

“안녕하세요, 할머니”

“아이고, 우리 광수(막내) 왔어~“


할머니 눈에는 맨 앞에서 있는 나보다 맨 뒤에 있던 동생이 먼저 보이셨나 보다. 이상하다. 할머니는 키가 작으신데. 인사도 내가 제일 크게 했는데..


나는 명절이 정말 싫었다.

특히 친할머니댁에 가야 하는 날이 다가오면 더욱 명절이 싫어졌다. 안 그래도 나의 애매한 존재감이 어느 때보다도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자리였기 때문이다.


처음부터 그랬던 건 아니었다. 날 때부터 나는 든든한 빽이 있었다. 바로 친가의 실세, 친할아버지이다. 당신과 얼굴이 묘하게 닮았다는 이유로 나를 유독 예뻐하셨다. 덕분에 나는 소외되거나 외롭지 않았다. 오히려 대장 어른의 최애로 스포트라이트를 받을 수 있었다.


하지만 할아버지께서 돌아가신 후 나의 존재감은 자연스레 옅어져 갔다. 친가에는 총 7명의 손주들이 있었다. 그중 셋은 아들이고 나머지 셋은 첫째이자 막내딸들이었다. 그리고 유일한 샌드위치 둘째인 나. 세명 중에서도 애매한데 일곱 명 사이에서는 오죽했을까. 할아버지 그늘에 있지 않으면 당연히 애매해지는 입장이었다.


오촌 육촌 친척 어른들께 나를 소개할 때면 유독 설명이 길어졌다. 동생이랑 터울이 얼마 안나다 보니 내가 태어났었는지도 모르는 분들도 계셨다. 남동생은 ‘장손주’라고 모두 빠짐없이 기억하는데 나는 참 잊히기 쉬운 존재였다.


다른 손주들보다 외모가 뛰어났다면 어땠을까?

상위권 성적표를 받아왔다면 좀 나았을까?


안타깝게도 나는 둘 다 아니었다. 중학생이 되면서 나의 외모는 점점 평범에 가까워졌고, 공부 잘하는 손주들 사이에서 나는 딱 평균 수준이었다. 그렇다고 성격이 밝거나 싹싹하지도 않았다.


안 그래도 애매한데 더 애매해졌다. 태생부터 존재감이 애매하다면 어디 하나 튀는 구석이 있어야 하는데. 나는 너무 보통이었다. 그래서 매번 가족모임이 불편했다. 또 가족이 불편했다.


28살 대기업에 합격했던 날이었다.

그 해에 처음으로 명절이 기다려졌다. 친가에서 가장 먼저 대기업에 취업한 손주가 바로 나였기 때문이다. 그간 없었던 존재감이 다시 피어오를 수 있는 기회였다.


나의 기대에 부응하듯 할머니의 태도는 완전히 달라지셨다. 교회 전체에 내 자랑을 하고 다니시고 심지어.. 할머니 휴대폰 배경화면을 내 얼굴로 바꾸셨다. 그간 내가 대학원에 다니는지 휴학을 했는지 매번 헷갈려하셨던 할머니였는데.


기분이 썩 좋지 않았다. 그리고 할머니가 미웠다. 할머니의 자랑거리가 되어야만 나를 알아준다는 것이 너무 억울했다. 나는 무언가를 이뤄내야만 사랑과 관심을 받을 수 있는 존재라고 온 세상이 말해주는 것 같았다.

할아버지가 보고 싶었다. 애매했던 나를 조건 없이 특별하게 만들어주던 할아버지의 사랑이 그리웠다.


둘째의 애매함이 나에게 남긴 흔적들이 있다.


첫째, 나는 관종이다.

누군가의 관심을 받아야 존재감을 느끼는 사람이 되었다. 관심을 받는 방법은 상대에 따라 다르다. 상대가 원하는 것을 빠르게 캐치하고 이를 충족시켜 준다. 좋게 보면 눈치가 빠르고 어떻게 보면 약은 구석이 있다.


그래서 나는 그룹에 따라 다른 성격을 갖는다. 사랑받을만한 성격을 선택하고 그 안에서 이미지를 구축한다. 있는 그대로 나를 표현하는 데에 두려움이 생겼다. 또 애매해질까 봐, 존재감이 없어질까 봐.


둘째, 나는 매사 경쟁한다.

삼남매 뿐만 아니라 친척들, 친구들 사이에서도. 나는 항상 이겨야 한다. 작은 일(게임, 퀴즈 등)에서 지면 기분이 하루종일 좋지 않다. 이겨야 내가 튈 수 있고 관심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 이 두 가지 흔적들은 나를 피곤하게 만든다. 온전한 나에게서 멀어지게 한다. 하지만 지금은, 그저 남아 있는 마음속 상처를 매만져 주고 싶다. 어찌됐든 지금의 나를 만든 건 나의 관종력과 경쟁심이니까. 지금의 내 모습이 나쁘지 않으니까.


이렇게 하루하루 지내다 보면 언젠가 나의 애매함이 더 이상 나를 아프게 하지 않는 날이 올거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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