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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비니스 Aug 13. 2024

미우나 고우나 내 누나니까

Episode 5. 남동생의 주먹

피는 진짜 물보다 진할까?

나는 이 말에 공감하지 않았다. 피 한 방울 안 섞여도 진한 관계가 있고, 피가 섞였어도 묽은 관계도 있으니까.


하지만 나에게도 ‘피’가 그 어떤 관계들보다 특별했던 순간이 있었다.

출처: 유투브, 응답하라 1988 레전드

21살 대학교 2학년. 서로 집에 숟가락 개수까지 아는 고등학교 친구들과 가진 오랜만의 술자리였다.


분위기가 무르익어가며 대화의 수위는 아슬아슬하면서 스릴 있게 흘러갔다. 하하호호 떠들던 와중에 나의 오랜 절친이 취기 가득한 목소리로 말했다.


“야, 광수(동생)는 여전하냐?”

“응~ 재수 학원 열심히 다니고 있지”

“야 걔는 재수하면 안 됐어. 차라리 전문대를 가서 기술을 배우는 게 훨씬 잘 맞을걸?”


내 동생에 대해 누구보다 잘 아는 친구 입에서 나온 말이었다. 학창 시절 내내 동생에 대한 나의 푸념을 들어주던 친구의 말이기도 했다. 이 시건방진 무시발언의 출처는 ‘나’였을테고, 언젠가 내 입에서 먼저 나왔었던 표현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앞뒤 사정 불문하고, 그 말을 듣는 순간 내 꼭지는 이미 돌아가 있었다. 온갖 욕설이 난무하면서 그와 싸웠다. 그렇게 그날 나는 동생 때문에 10년 지기 친구 한 명을 잃었다.


남매란 내가 욕하는 건 괜찮지만 남이 욕하면 절대 안 되는 사이를 말한다. 또 내가 때리는 건 괜찮지만 어디서 맞고 들어오면 절대 안 되는 그런 사이기도 하다.


나와 동생이 딱 그랬다. 내 입으로는 얼마든지 동생 욕을 할 수 있다. 하지만 남의 입에서 동생 험담이 나오는 건 다른 문제였다.


나보다 어린 동생을 지켜주기 위한 누나의 본성 때문일까? 아니다. 위아래가 중요한 게 아니었다. 같은 피가 흐르는 사람들끼리 갖는 ‘피 끓는 의리’가 있기 때문이었다.


고등학교 문예 동아리에서 차장을 맡고 있었을 때였다. 2학년이 되고 선배노릇 좀 하고 싶을 즈음에 광수의 친구가 신입생으로 들어왔다.


처음에는 동생 친구이기도 하니 장난도 자주 받아주며 격의 없이 지냈다. 그러나 그의 장난 수위는 점점 선을 넘어갔다. 직책을 빌미로 총대를 메고 그 친구에게 문자로 한 마디를 했다. 그렇게 사건은 시작이 되었다.


“님 저랑 몇 살이나 차이 난다고 선배질이에요ㅋ 저 그냥 동아리 나갈게요 ㅃㅇ xx 재수 없네"


이 무시무시한 답장을 받자마자 손이 떨려왔다. ’내가 여자라서 이렇게 버릇없게 구는 건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집에 있던 나는 분한 마음으로 핸드폰을 들고 광수 방으로 들어갔다.


“야 니 친구 왜 이렇게 싸가지가 없어?”

“뭔데”

“얘 말하는 꼬라지 좀 봐. 너가 뭐라고 좀 해줘”

“(폰에 떠있는 문자메시지를 쓱 보더니)아, 니가 알아서 해. 왜 나한테 와서 난리야“


해결을 바라고 찾아갔던 건 아니지만 섭섭했다. 누나가 자기 친구한테 개무시를 당하고 있는데 얼굴 표정 하나 안 바뀌다니. 역시 남동생은 남보다 못하다 싶었다.


동아리 부장에게 이 사실을 알리고 그가 탈퇴 수순을 밟으면서 이번 사건이 일단락되는 듯 보였다. 새로 온 문자를 보기 전까지는.


“누나 정말 죄송합니다. 제가 생각이 짧았어요. 그렇게 버릇없게 말하는 게 아니었는데 정말 죄송합니다. 죄송해요..”


싹수없던 문자를 보낸 지 이틀 뒤였다. 180도가 달라진 그의 태도에 문자를 잘못 보냈나 의심이 들었다. 아니면 혹시 동아리 부장이 따로 만나서 혼내줬던 걸까.


찜찜하게 있던 찰나에 동생이 방으로 들어왔다.


“걔한테 연락 안 왔어?”

“왔어..”

“그새끼 불러다가 좀 패줬다.

앞으로는 안 그럴 거야”


어안이 벙벙했다. 광수가 나 때문에 애를 불러다가 팼다고? 공부는 못했어도 주먹싸움은 안 하는 앤데. 자초지종 상황을 들어보니 싸움 좀 잘하는 친구들 데려가서 겁만 줬다고 한다.


감동이었다. 다소 폭력적인 대응이었지만, 내 입장에서는 솔직히 속이 다 시원했다. 겉으로는 툴툴대면서 자기와 상관없는 일처럼 대하더니 속으로는 화가 나긴 났었나 보다.


백 마디 위로의 말보다,

뒤에서 나를 대신해 싸워준 동생의 주먹이 더 따듯했다. 가장 진하고 든든한 빽이 되어주었다. 그날의 일은 나에게 있어서 남자의 주먹이 정당화될 수 있는 유일한 사건이었다.


15년이 지났어도 나은 술에 취하면 여전히 이 에피소드를 말하곤 한다. 술기운을 빌려 동생과의 뜨거운 피의 관계를 은근히 자랑하고 싶나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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