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섬산문
벗어놓은 내 구두를 바라본다. 거기 나의 보폭과 속도와 전진의 땀이 숨어있다. 거기 나의 직립의 주춧돌이 놓여있다. 거기 나의 고통스런 비틀거림이 쭈그리고 있다.
입을 벌린 듯, 쉬고있는 나의 구두. 평발에 가까운 편이라 유난스럽게 골고루 밀착해오는 바닥. 닿는 인연의 면적이 컸던 만큼 그리움도 커졌을까. 나의 발이 빠져나간 뒤 빈집같은 스산함이 감돈다. 누군가, 내 그림자같은, 내 기억같은 투명한 사람이 그 빈 신발을 딛고 서있다. 모든 때묻은 것들에는 저렇듯 추억이 들어서는구나.
그대를 돛배 삼아 난 세상을 헤엄치고 다녔나니. 지구의 구석구석, 이 강산의 방방곡곡을 유린하였나니. 그대는 나를 지상으로부터 올려놓은 2센티미터의 형이상학이다. 명쾌한 상승, 든든한 반석이다. 하지만 그만큼 난 땅바닥에서 멀어져, 격화소양, 그 견딜 수 없는 존재의 부유(浮遊)에 괴로웠나니.
내 열개의 발가락들은, 그리고 발뒷꿈치나 발바닥의 볼들도 그대의 체온을 기억한다.그 텁텁하고도 포근한 원초적 휴식에 길들여져 있다. 나의 발은 그대 속에 갇혀 자유를 꿈꾸지만 그대를 떠나있는 짧은 순간마저 그대의 부재를 견디지 못한다. 곧 불편하고 불안해진다.
그대는 나의 뛰고자하는 욕망의 장치를 가두고 에워싸지만 그 가둠과 에워쌈이야 말로 나를 제대로 뛰게 한다. 그대의 질곡만을 보는 사람은 그대를 성토하겠지만 그대의 노동까지 살피는 사람은 전체를 통찰하는 사람이다. 비약 혹은 도약을 위한 가둠의 뛰어난 알레고리, 그것이 그대이다.
그대여. 난 그대의 노동의 진실한 부분을 유심히 들여다보지 못한 자이다. 늘 지표에 붙어 뱃가죽으로 기어가는 너의 충실하고 고단한 노동의 실상을 가끔씩 아니 자주 잊어버린다. 한 존재의 무게를 시시각각 견뎌내며 이곳저곳으로 그 짐을 이동시켜야 하는 너의 수고는 그것이 너무 말없이 이뤄진다는 이유 때문에 별로 주목을 받지 못한다. 너는 너의 작은 몸이 감당하기 어려운 일을 하는 동안 튼튼하게 봉제된 살이 터지면서 낡아가는 존재다. 너는 괴로운 노동자이지만 언제나 위계질서의 가장 아랫쪽에서 닥쳐온 운명을 감수한다. 너는 거리의 더러움을 온몸으로 받으며 인간세상의 굴곡과 지형을 익힌다. 껌조각들과 오물들과 입맞추면서도 주저하지 않고 너의 주인을 안전하게 옮겨야 한다. 너의 누더기는 나날의 전투를 증명하는 아름다운 훈장이지만 그것을 뽐낼 시간은 없다.
구두여, 그대는 낡으면 서슴없이 버려지지 않는가. 그동안 그대에게 익숙했던 발가락들은 재빨리 새로운 편안함을 찾아 그것에 안주하리라. 그대는 배신감을 느낄까? 온전한 사랑에는 원망이 없다. 주었던 모든 것만이 운명에 종속되어 있었을 뿐 받아야할 무엇에 대해선 무심한 것이 사랑의 맹목(盲目)이 아니던가. 그대의 주검은 태우기도 어렵고 파묻어두기도 곤란한 골칫덩이의 쓰레기로 가장 더러운 것들과 나란히 쓸쓸한 찬바람 속에 얼어죽어가리라. 그 빈사의 회억 속에 한때 그대의 일편단심 우러르는 존재였던 나의 발가락의 체온이 들어있을까.
하지만 지금 그대는 주인을 명상하는 다소곳한 종처럼 분부를 기다린다. 어디론가 떠나가고 싶은가. 내가 바라보자 들뜬 표정을 감추지 못한다. 평생 조강지처인 그대의 짝에 기대어, 가장 자유스럽지 못한 삶의 너무나 행복한 한때를 유감없이 보여준다. 나의 자유는 이 완전한 희생의 반석 위에 올려져 있는 것이로구나.
구두여. 왼쪽 오른쪽 두몸이 하나처럼 움직이는 따뜻한 물건이여. 내 자유를 품어온 가장 천하고 귀한 존재여. 내가 평생 배워야할 아름다운 스승, 내가 떨치기 전엔 절대로 스스로 홀로 걸어가버리지 않는 그 운명을 한번도 거스런 적이 없는 충직한 친구여. 지고지순한 사랑, 황홀한 은유의 구두여. /빈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