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섬편지
당신을 만난 짧은 날들의 처음을 기억하는 일이 별로 어렵지 않을 것 같은데, 뜻밖에 나는 그날을 기억해내지 못한다.
당신이 언젠가 우리가 만난지 한달이 되었는데, 라고 말하는 걸 들으며, 우리가 언제 만났지 하는 물음을 안으로 던져봤지만 그 날짜를 찾을 수 없었다. 다만 그날이 금요일이었던 건 기억한다.
왜 그 날을 나는 기억하지 못할까. 당신이 내게로 오던 날, 내 생애의 기슭에 닿던 날. 나는 어쩌면 그 날을 시간의 처음처럼 받아들였던 건 아닐까.
환한 빛과 알 수 없는 불안과 슬픔과 진정할 수 없는 전율이 그 날의 정체를 알아차리지 못하게 했던 건 아닐까.
그래서 나는 당신을, 이 낡아가는 생이 마주친 첫사랑이라고 부른다. 첫사랑의 두려움과 긴요함과 개결함을 갖춘, 완전한 망아(忘我).
날짜가 없는 그날 금요일의 인사동, 귀천(歸天)에서 천상병 시인의 이 세상 소풍을 약간 다른 의미로 누렸다.
따뜻해진 모과차 잔에 손바닥을 대보며 당신을 기다리던 날, 나는 이 쩔쩔매는 삶의 시작을 짐작할 수도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