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월비비추와 함께 한 그날
우리나라 산은 계절마다 아름다운 옷을 갈아입는다. 봄, 여름, 가을, 겨울, 제각기 아름답지 않은 산은 없지만, 그중 ‘소백산(小白山)’만큼 계절의 변화를 가장 또렷하게 보여주는 산도 드물다. 소백산은 1,439m로 우리나라에서 열여섯 번째로 높은 산인데, 다른 일천 미터 이상의 고산들이 주는 중압감이 없다. 능선은 장엄하면서도 부드럽고 경사는 완만해서, 많은 등산객이 찾는다. 봄부터 가을까지 산 곳곳에서 야생화의 향연이 펼쳐지고, 겨울이면 산 위에 눈꽃이 장관을 이룬다. 계절의 색은 그대로 산에 스며든다.
여름이 시작되는 유월, 소백산 정상은 가는 봄을 아쉬워하는 연분홍 철쭉이 흐드러지게 핀다. 철쭉은 ‘연달래’라고도 하는데, 진달래가 ‘진한 달래’라는 의미라면, 철쭉은 꽃 색이 연하다 하여 ‘연달래’로 부른다는 설이 있다. 어떤 이들은, 진달래에 이어서 피는 꽃이라는 의미에서 ‘연달래’로 칭한다고도 한다. 둘 다 따뜻한 봄에 피는 꽃이라 아름답고 반가운데, 진달래가 생기발랄하고 젊은 느낌을 주는 반면, 철쭉은 성숙하고 우아한 느낌을 준다. 철쭉의 풍성한 꽃잎은 산마루에 짙은 관능을 드리운다. 그 무게감 있는 향기는 바람결에 묵직하게 퍼져 나가며, 마치 오래도록 간직한 비밀을 속삭이는 듯하다.
철쭉이 한바탕 질펀한 춤판을 벌이고 나면, 그 뒤를 이어 ‘일월비비추’가 소백산 정상부를 장악한다. 철쭉의 시간이 농염하고 화려한 축제였다면, 일월비비추가 이끄는 시간은 잔잔한 독서 모임과 같다. 고요한 열정으로 문장을 읽은 후, 정제된 느낌을 공유하는 것은, 새벽이 밝아올 무렵 소백산 정상에서 투명하게 빛나는 일월비비추의 영롱함과 다르지 않다.
늦은 칠월 어느 새벽, 일월비비추가 주관하는 독서 모임에 초대받은 기분으로 소백산을 올랐다. 일월비비추는 어두운 숲길을 헤치고 올라온 나를 마중 나온 것처럼 반짝거렸다. 가녀린 몸매에 쪽 찐 머리 모양을 한 일월비비추는 가벼운 바람에도 흔들렸는데, 그럴 때마다 위태로웠고, 나는 안절부절못했다. 하지만 그런 느낌도 잠시, 바람에 몸을 맡긴 채 하늘거리는 그들에게서 나는 오히려 강인한 생명력을 느꼈다.
산을 오르며 뜨겁게 달구어졌던 몸이 서늘한 바람에 금세 식는다. 지치고 힘들었던 마음도 치유되는 것 같다. 그것은 일월비비추와 일출의 풍경이 나에게 주는 위안이다. 산은 단지 오르는 대상이 아니다. 삶의 무게를 잠시 내려놓게 해주는 쉼터이고, 다시 앞으로 나아갈 힘을 얻는 자리다. 소백산은 그렇게 또 한 해의 여름을 품으며, 변함없이 그 자리에 서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