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세째 잔, 슬픔과 평온함

프랑스 생활기

by binter

장기 여행의 장점 중 하나는 유명하지 않더라도 흥미로운 곳을 찾아볼 여유가 있다는 점이다. 나의 여행 스타일은, 가보고 싶은 카페들을 구글맵으로 찾아서 핀을 꽂아 놓고, '오늘 갈 카페'를 하나 정한다. 그리고 간 김에 주변에 방문할만한 곳들을 찾는다. 오늘 갈 카페는 파리 20구에 있었다. 이곳은 관광객들이 잘 찾지 않는 동네다. 한국어로 "파리 20구"를 치면 정보도 거의 나오지 않는다. 파리에 꽤 장기간 머물면서 친해진 사람들의 추천을 받아 '뷰뜨 쇼몽 공원'도 찍고 오기로 마음먹었다.


전날 밤, 늦게까지 밖에서 "파리는 밤이 제일 예뻐" 하며 낭만 무새 짓을 하느라 컨디션이 영 별로였다. 정오가 지난 시간에 일어나 찌뿌둥한 몸 상태로 인해 가지 말까 고민을 잠시 했다.

'민트티를 마시고 다시 생각해 보자'

겨우 몸을 일으켜 전기 포트에 물을 올리고 애정하는 컵에 민트티 티백을 넣었다. 다 끓여진 물을 컵에 담고 파리의 예쁜 구옥이 보이는 창가에 앉아 멍하니 있었다. 잔을 반쯤 비웠을 때, 다시 생각했다.

'오늘도 너무 예쁘잖아, 나가자'


부랴부랴 준비를 끝내고 지하철 역에 도착했다.

느낌상 파리는 우리나라보다 반대편 대합실 간 거리가 짧은 편이다. 또한, 우리나라처럼 스크린도어가 설치된 곳도 몇 없다. 그래서 반대편 쪽 사람들이 얼마나 있고 어디서 뭘 하는지 너무 잘 보인다. 그때, 우리 쪽으로 너무나도 반갑게 손을 흔들고 있는 여성이 보였다. 저 인사의 수신자는 누구일까. 내 옆에 있던 신사였다. 반대편 여성은 손가락으로 숫자 2를 만들며 '내 쪽은 2분 남았어! 너는?'을 말하고 있었다. 그러자 남성은 숫자 1을 만들며 '1분 남았어!'를 외쳤다.


이상하게, 정말 이상하게도 나는 이 광경을 보고 너무 슬퍼졌다. 눈물이 차오를 만큼...

현재 우리나라의 대합실은 빈틈 하나 없이 스크린 도어에 꽁꽁 싸매어져 있다. 예기치 못한 사고를 예방하기 위함이라는 건 너무나 잘 알고 있다. 그런데 왜 이곳, 프랑스에는 없을까. 그렇게 머나먼 과거를 생각했다. 우리나라는 워낙 외세의 침략과 지배를 당하기 일쑤인 나라였고, 프랑스는 오랜 기간 유럽의 강대국 자리를 지키며 기세등등함을 유지해 온 나라였다. 이런 배경이 우리나라는 방어와 혹시 모를 최악의 상황에 대비하는 것에 익숙한 나라, 프랑스는 어느 정도의 리스크를 감수하더라도 자율과 개방감을 중시하는 나라로 만들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나를 슬프게 만들었다.


눈시울이 붉어질 때 즈음 다행히 열차가 도착했다. 나는 억지로 이 슬픔에서 벗어나고 싶진 않았다. 슬픔이 꼭 나쁜 것만은 아니지 않은가. 슬픔이 밀려왔을 때 마음껏 받아들이고 싶었다. 나의 플레이리스트 중 가장 음울한 노래를 들으며 그렇게 20구에 도착했다.




지상으로 올라가자 갑자기 분위기가 180도 변했다. 쨍한 햇볕 아래 야외석에서 주말을 즐기고 있는 사람들이 눈앞에 펼쳐졌다. 한걸음 한걸음 내딛을 때마다 활기가 더욱 차오르는 느낌이었다. 예쁜 골목 옆에 또 예쁜 골목이 있었다. 카메라 셔터를 쉴 새 없이 움직였다. 나의 첫 목적지인 카페는 잊고 그저 걷고 보이는 것에 집중했다. 몇 분을, 아니 몇 시간을 걸었는지 모르겠다. '이제 앉아서 좀 쉬자' 하고 드디어 카페를 찾기 시작했다. 카페를 찾아 돌아다니다 멋진 옷을 입은 사람들이 춤을 추고 있는 광장을 발견했다. 남성분은 턱시도를, 여성분은 강렬한 레드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그들은 여유로웠으나 또한 강렬했다. 정말 사람은 모두 이어져 있는 것일까, 그들을 가까이서 보고 있던 나조차도 그들과 같은 사람이 된 것처럼 느껴졌다.


그곳에서 한참을 그들과 즐거움을 나누다 다시 걷기 시작했다(커피는 물 건너갔다).

하염없이 걷다 보니 웬 지상낙원이 보였다. 작은 언덕 위, 나무와 나무 사이에 "Happy Birthday"가 쓰인 작은 현수막이 걸려있고, 그 아래 아기자기한 돗자리 위 천사 같은 아기들이 예쁜 드레스를 입고 너무나도 사랑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리고 그 아래에는 잔잔하고 반짝거리는 호수가 펼쳐져 있었다. 호수 주변 경사진 잔디밭에는 사람들이 연인, 가족, 친구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마치 명화를 보는 것 같았다. 이곳이 바로 "뷰뜨 쇼몽 공원"이다. 이 멋진 광경을 보자 어딘가에 비축해 놨던 에너지가 쓰이는 것인지 다시 또 한참을 걸으며 천국을 구경했다.


나의 프랑스 친구가 말했다.

슬픔은 과거로부터 오고,

평온함은 현재로부터 오고,

기쁨은 나눔으로써 오고,

화남은 통제하려 할 때 오고,

두려움은 미래로부터 온다고.


슬픔과 평온함을 느낀 하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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