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피를 처음 만난 건 엄마의 믹스커피. 학교 갔다 오면 식탁에는 엄마가 방금 타 둔 믹스커피 한 잔이 놓여있었다. 오전 집안일을 마치고 한숨 돌리며 저녁메뉴 구상을 하고 계셨으리라. 아니면 우리 삼남매가 집으로 들이닥치기 전 마음을 진정시키기 위한 일종의 의식이었을지도 모른다.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김을 타고 달달한 향이 올라왔다. 하지만 선뜻 마셔 볼 생각은 들지 않았다. 진한 갈색은 그 옛날 장옥정이 마시고 죽었다는 사약을 연상케 했다.
시간이 흘러 믹스커피보다 더 한 놈이 한국에 상륙했다. 아메리카노. 그 쓰디 쓴 음료에 일부러라도 시럽을 타지 않으면 단맛은 전혀 없다. 탕약인지 사약인지 모를 이것을 왜 굳이 찾아 마실까. 인생의 쓴 맛, 입시의 쓴 맛, 육아의 쓴 맛. 이곳 현실과 커피의 쓴 맛은 분명 닮은 구석이 있었다. 그래, 내가 모르는 매력이 있을지 몰라. 그날로 한 카페에서 운영하는 커피 취미반에 등록했다. 한창 카페 창업이 유행처럼 번지던 때라 이왕이면 자격증을 따라는 주위의 말에 반하는 결정이었다. 커피를 좋아하지도 않으면서 자격증 반이라니. 양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꽉 막힌 사람.
금요일 퇴근 후 커피를 배웠다. 작은 버너 위에 가벼운 냄비 하나를 올렸다. 뚜껑을 덮은 채 생 원두를 볶다가 간간히 뚜껑을 열어 짙은 갈색으로 변하는 것을 지켜보았다. 탁탁 소리가 나는게 군밤을 연상케했다. 천천히 그라인더로 갈아내었다. 드르륵 걸리적 거리던 소리가 잦아들었다.
수업 기록용으로 찍은 폰 폴라로이드
그 사이 핸드드립 주전자가 부글부글 거렸다. 주전자 입구로 나오는 가느다란 물줄기로점점 좁아지는 나선을 그리며 커피가루에 부어 내렸다. 첫 물은 버리고 두 번째 내린 커피부터 모아 마지막 쓴 물이 내려오기 전에 재빨리 거름망을 거둬버렸다. 향이 날아가 버리기 전에 얼른컵을 천천히 입술에 갖다 대었다.
뜨거운 김을 타고 올라온 커피향이 나를 먼저 반겼다. '음~' 하고 방심한 사이 커피 한 방울이 내 혀를 타고 흘렀다. '윽!' 쓴 맛이었다. 하지만 미간이 찌푸려지는 그것과는 달랐다. '오~!' 오히려 이거구나 싶었다. 어딘가 낯익은 맛이었다. 내 앞에 이 한잔이 나오기까지 그 변화와 향을 줄곧 함께 했기 때문이리라. 그 커피 향을, 맛을 오래도록 잊을 수 없었다.
에스프레소 맛보기, 라떼 거품모양 만들기, 원두 종류별 맛 식별하기 등 몇 가지 활동을 더 해본 후 취미반 과정을 마무리했다. 지금도 여전히 취미반을 하길 잘했다고 생각한다. 원두를 종류별로 갖다 줘도 크게 구수함과 시큼함, 두 가지 카테고리만 머리에 들어왔다. 손님이 원두추천이라도 해달라고 하는 날엔 장사를 접어야 할 판이었다. 그렇다고 이 이상으로 파고들기에는 카페인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몸을 타고 났다. 커피를 마시면 금방 심장이 두근거려 뱃속까지 울렁거릴 지경이었다. 에스프레소 수업을 한 날은 밤을 꼴딱 새우기 일쑤였다. 그래도 한 가지 사실만은 분명히 알 수 있었다.
처음으로 만든 라떼. 내눈에만 예쁘다.
나는 느린 사람이었다. 무엇이든 천천히 조금씩 내 것으로 만들어야 했다. 그래야 납득이 갔다. 주문대 앞에만 서면 아메리카노를 외치는 사람들을 이해하기 위해 두어달 동안 커피를 볶고 갈고 내리고 마셔야 했다. 잘하고 싶어서, 잘해야 하니까 급히 속으로 쑤셔 넣은 것들 때문에 체해버린 느낌이 이것 때문이었구나. 빠르게 돌아가는 회사의 생태를 따라가려 발버둥 치면 칠수록 가랑이가 찢어지는 뱁새였구나.
못하는 것이 당연했다. 결코 이상한 것이 아니었다. “괜찮아. 천천히 하면 되.” 막히는 일 앞에서는 이렇게 조용히 되뇌었다. 그러면 굳어있던 내 몸과 표정도 점점 풀리는 것을 느꼈다. 서글서글한 말투는 덤이다.
조금씩 ‘나’를 찾아갔다.
lt is far more difficult to judge oneself than to judge others. If you succeed in judging yourself correctly, then you are truly a man of wisdom.
다른 사람을 판단하는 일보다 자기 자신을 판단하는 것이 더 어려워. 만약 너 자신을 올바르게 판단할 수 있다면, 너는 진정 지혜로운 사람인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