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난히 손발이 찼던 나에게 엄마는 매년 겨울이면 생강차를 달여주셨다. 김장철이 되면 시장에서 생강을 한 아름 사오셨다. 겨우내 마실 생강차 거리도 다듬을 겸 넉넉히 사온 것이다. 껍질을 까서 깨끗한 물에 씻어 낸 뒤 칼로 얇게 썰어 말렸다. 돈데크만 주전자에 생강과 물을 넣고 약한 불에 천천히 달였다. 물이 졸아들면 또 다시 물을 부어 바글바글 끓이기를 두어번, 진한 생강차가 우러나온다. 거기에 꿀을 한두 스푼 타서 저어주었다. 젓는 동안 숨을 깊이 들이마시면 생강향이 코를 찔렀다. 부드럽게 넘어오는 커피 향과는 결이 달랐다. 그 많은 생강을 오직 나 혼자 마셨다. 동생들은 차라리 쓰디 쓴 약을 먹겠다며 생강차를 마시는 나를 보고 눈살을 찌푸렸다. 뜨뜻한 생강차가 목구멍으로 천천히 넘어갈 때 느껴지는 칼칼함. 마치 어른들이 뜨거운 온천에 몸을 담그며 “시원하다”고 말하는 것과 같은 맥락이었다. 이 매력을 너희는 모르지. 암, 나만 알고 너희는 모르지.
고3 시절 수족냉증이 그 어느 때 보다 심해졌다. 몸을 데우기 위해 아침에 싸온 생강차가 다 떨어지면 선생님께 생강차 가지러 집에 갔다 와야 한다고 했다. 꿀밤을 맞아도 가야한다고 했다. 덕분에 우리 교실은 달콤 쌉싸름한 생강 향으로 꽉 차있었다. 목이 칼칼하게 부어오지만 누워있는 아이를 업고 가기에는 몸이 무거웠다. 아픈 몸을 이끌고 병원에 가는 것을 포기해야 할 때 어김없이 생강차를 달여 마셨다. 계속되는 야근으로 약국에 갈 시간조차 없을 때에도 생강차는 꼭 챙겨마셨다. 나에게는 입시도, 육아도, 사회도 커피의 쓴 맛이 아닌 생강차의 매콤 칼칼한 맛이었다.
다행히 회사내 카페에는 겨울 계절차로 생강차를 판다. 엄마가 다려준 생강차만큼은 아니지만 잠깐의 여유를 부리는 시간에 내 몸을 데우기에 충분했다. 여름에도 비운의 에어컨 바로 아래 자리에서 찬바람을 맞고 있자면 뜨끈한 생강차가 생각났다.
그러고 보니 차는 자기만의 분명한 맛을 갖고 있다. 그만큼 특별한 효능도 갖고 있다. 생강차를 마시게 된 사연도 유달리 찼던 내 몸을 데우고자 함이었고 매콤 칼칼하면서 달콤한 맛이 내 입맛에 딱 맞아 떨어졌기 때문이었다. 주위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차를 나의 기분과 몸 상태에 따라 골라 마시는 일. 곧 나를 바로 알고 챙기는 일이었다.
매일 커피를 마시는 것으로 지친 나를 억지로 일으키지는 않았는가. 감기는 눈을 겨우 뜨고 있지는 않았는가. 그렇다면 주말 하루쯤은 그저 내 몸을 쉬게 하는 차 한 잔으로 ‘달콤한 게으름’을 피워보는 것은 어떨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