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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빈틈 Feb 20. 2023

숨은 생일찾기

'나'를 챙기는 말로 노크하세요


사회는 나의 생일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다.


야근하다 시계를 보니 12시, 허무하게 생일이 지났다. 심지어 해외출장 중 호텔방에서 혼자 생일을 보기도 했다. 그나마 회사 식당에 우연히 내 생일과 미역국 메뉴가 겹친 날은 속으로 외쳤다. '감사합니다!' 결혼하고 첫 생일을 맞아 남편과 춘천으로 여행을 떠나는 길에는 유난히 심해진 차 멀미를 견뎌야했다. 여행길이 아니라 그야말로 "고생길"이었다. 그 다음날 임신 테스트기에서 두 줄을 봤고 입덧은 나날이 심해졌다. 어느 날 해외출장 나간 남편이 나에게 생일선물로 뭘 갖고 싶냐고 물어봤다. 다 필요없고 집에 오자마자 아이를 좀 봐달라고 처절히 호소하기도 했다.


그때마다 떠올리려 했다. '어떤 생일을 바랐더라?' 생각나지 않았다. 지금은 그저 집에서 조용히 보내고 싶었다. 엄마가 끓여준 미역국이 먹고 싶었다. 생일에 굳이 약속을 잡지 않더라라도 우연히 만난 옛 친구와 우리 함께 보냈던 소소한 이야기가 나누고 싶었다. 내년 생일은 특별할꺼야. 오늘은 그저 운이 좋지 않았을 뿐이야. 그렇게 한 해, 두 해 지나며 생일은 "일상"이라는 단어에 묻혔다. 생일은 더 이상 내 마음 속 공휴일이 아니었다. 생일에도 아이를 돌보고, 생업을 이어가야 했다. 열 일 제치고 가출할 배짱도, 일과를 마치고 밤새 놀 수 있는 체력도 바닥났다. 이런 푸념을 늘어놓을 때면 우리 시어머니께선 철없는 며느리 귀엽다는 말투로 말씀하셨다.


"늙지도, 젊지도 않은 어른은 생일 챙기는 거 아니다."



그런 와중 내 생일 초 자기 인냥 서로 먼저 부니 마니 다투는 아이들 모습이 조금은 얄미웠다. 시들면 버려야 하는 것이 아깝다며 꽃 한 다발도 사오지 않는 남편은 조금 더 미웠다. 아이들이 일년 중 몇 안되는 촛불 부는 날을 손꼽아 기다리는 것을 알면서, 남편이 회사 일 바빠 버둥거리는 것 다 알면서. 20년 전 그 어린 마음으로 앉아 있는 나만 한 없이 작아졌다. 아니, 그냥 쫌생이가 되어버렸다. 그러다 정신이 번쩍 들었다.


'아, 맞다. 나 어른이었지?'






어렸을 적 부모님과 학교라는 그늘 아래에서 일년에 한 번 나의 존재를 안전하게 챙길 수 있었다. 이제는 모든 걸 스스로 해결해야 하는 어른이 되었다. 하지만 스스로 나를 잘 챙길 수 있는 온전한 어른이 되었는가를 묻는다면 솔직히, "아니올시다". 그래서 더욱 연습이 필요했다. 시작하지 않으면 내 생일은 10년 뒤에도, 20년 뒤에도 그저 그런 일상 중 하나로 흘려버리게 될 일이었다.


그 다음 해 생일이 되기 며칠  남편에게 말했다.


"결혼하고 아이 생기니 누구 엄마라고 불리는 일이 많아. 이런 생각 오버인 것 아는데 내가 사라지는 것 같아서 기분이 좀 그렇더라. 거기에 생일까지 그냥저냥 보내니 사실 그동안 좀 우울했어. 어렸을 때는 우리 둘 다 엄마들이 미역국 끓여주셨잖아. 이젠 우리 서로 끓여주자. 오빠 생일엔 내가 끓여주니까, 내 생일엔 오빠가 내 미역국 끓여줘. 선물은 내가 갖고 싶은 거 생기면 말할게."


이동하는 차에서 엄마 생일 케이크로 생크림을 사느니 초코빵을 사느니 아우성인 아이들에게 말했다.


"엄마 생일이니까 엄마가 좋아하는 맛 고를거야. 너희 생일에 각자 좋아하는 맛으로 고르는 것처럼 말이야. 엄마가 고른 케이크로 함께 축하해줘."


케이크를 별로 좋아하지 않아 내가 좋아하는 아이스크림에 초를 꾲았다. 이날은 친정 부모님도 모셨다.


생일이 월요일이라 가족들이 다 같이 모이기 좋은 주말 저녁에 케이크 초를 켰다.


"엄마 생일이니까 엄마 소원빌어. 야! 너는 불지마!"

"엄마 생일에 뭐라도 바치거라!"에 답해준 아이들♡


"여보, 미역국 끓여뒀으니까 내일 아침에 애들이랑 먹어. 선물은 따로 못 준비해서 미안해. 자기 필요한 거 있으면 말만 해!"

남편의 홍합미역국. 짜고 달고 맛있다.


전혀 어색하지 않았다. 오히려 익숙했다. 늘 푸른 소나무처럼 겨울에도 내 생일 축하해주던 가족들이 생각났고, 입시의 고단함을 잊게 해준 친구들이 떠올랐다. 내 안에 아이가 웃고 있었다.  사이 이런 저런 이야기와 박수에 촛불이 다시 요동쳤다. '바람 앞에 등불' 이라는 말이 무색하게 지금의 걱정은 나중으로 미루고, 지금 나에게 오는 축하의 노래, 챙김의 말을 온전히 받아들였다.



나를 챙기는 것이 먼저이다. 차가운 이기심과는 엄연히 다르다. 바쁜 오늘을 지내고 있는 타인은 의도치 않게 나를 알아채지 못하고 있을 수 있다. 이제 어른이니까, 혼자 서운해하지 말고 나를 챙기는 말로 타인의 마음에 노크를 하자.


"나, 여기 있어요."



(사진출처 :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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