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이 되었지만 앞이 보이지 않는 어느 주말아침이다. 한 치 앞이 보이지 않는 그곳에 대한 공포보다 호기심이 더 커지는 순간, 무거운 몸을 일으켰다.
아파트를 벗어나 안갯속에 들어서니 콧 속이 시원해진다. 안개를 이루는 물방울 입자 하나하나가 내 콧 속을 간지린다. 아침을 먹지 않아 허전한 뱃속도 시원한 물 한 컵을 마신 냥 조금은 출렁이는 것 같기도 하다. 중간에 화장실도 없어서 급해지면 안 된다며 말도 안 되는 생각이 꼬리에 꼬리 물며 걷는다. 나를 촉촉하게 적셔주는 깊은 들숨과 날숨에서 내가 살아있음을 느낀다.
보이지 않으니 어느새 소리에 의지해 걷고 있었다. 그냥 걷는 것 같아도 작은 소리 하나에 나도 모르게 귀 기울이고 돌아보게 된다. 내가 밟는 나뭇잎은 바스락거리고, 안개의 수분을 머금은 흙은 먼지는 나지 않지만 밟을 때마다 미세한 입자끼리 부딪히며 소리를 낸다. 집에선 지나가는 차 소리에 묻혀 간간히 짹짹 소리만 들은 기억이 어렴풋한데 안갯속에서 서로 다른 새들이 이야기를 나누듯 하다. 짹짹, 찌르르, 휘리릭 그들이 나누는 대화에 한 마디 거들고 싶어 아쉬운 휘파람 소리라도 내본다. 하지만 헉헉거리느라 마른 입술로 내는 휘파람 소리는 새들만큼 맑고 선명한 소리와 거리가 멀다. 사람으로 치면 쉰 소리처럼 들리려나. 살아있는 누군가와 소통을 하려 할 때 나는 살아있음을 느낀다.
여기저기 제선충으로 잘려나간 소나무가 보인다. 제선충은 소나무 한 그루에 생기면 그 주위에 있는 소나무들도 빠르게 옮아 죽어나가기 때문에 얼른 잘라주어야 한다고 한다. 땅에 박혀 옴짝달싹 못하는 나무지만 그 줄기에서 느껴지는 우직함과 잎에서 보이는 파릇파릇한 생기만으로 살아있음을 온몸으로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기둥이 숭덩숭덩 잘려나가 쌓인 것을 보니 영락없이 넌 죽었다. 그리고 내가 살아있음을 느낀다.
한발 한발 옮기다 보니 "88한 계단"이 보인다. 계단, 너는 도대체 얼마나 많길래 나를 이리 괴롭히나 싶어 계단을 세어봤다. 88개였다. 이름을 붙이니 힘들다기보다 이 계단을 오르면 내 체력이 팔팔하게 살아날 것 같아 더욱 힘을 내어 걷게 되었다. 그 계단을 무사히 오르면 "토끼바위"가 나를 반긴다. 아직 젊다고 까불며 어느 나이 지긋하신 어르신을 쌩 지나쳐 산을 오른 적이 있다.그런데 초반에 달린 나머지 "88한계단"을 겨우 올라 그 바위에서 뻗다시피 퍼질러 앉았다. 혼자 헉헉거리고 있는데 인기척이 들려 고개를 들었다. 아까 지나쳐 온 그 어르신이 한발 한발 꾸준히 내딛고 있었다. 결국 어르신은 나보다 먼저 정상에 앉아 쉬고 계셨다. 아, 이 바위가 빠르다고 자만하며 토끼가 쉬어갔다는 그 바위구나. 그렇게 붙여준 두 이름. 아무것도 아닌 무엇도 이름을 붙이니 나에게 또 다른 의미가 되어 다가온다. 무생물에 생명을 불어넣는 작명의 순간, 나는 살아있음을 느낀다.
그렇게 살아있는 내가 정상에 왔다. 그리고돌 하나를 얹어 기도했다.
"살아있음에 감사합니다."
산을 내려오니 따뜻해진 날씨에 안개가 걷히고 나뭇가지의 끄트머리로 무언가 움틀 듯한 봉오리가 보인다. 그러고 보니 내일모레가 경칩이다. 엊그제가 입춘이었는데. 달리는 시간을 따라잡지 못하는 인간의 무력함을 느낀다. 하지만 이제 끝이라는 절망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내가 느끼는 무력감도 결국 살아있을 때 느낄 수 있는 것 중 하나이리라. 그렇게 겸손한 마음, 감사하는 마음으로 오늘 하루를 살아가 보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