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열 대통령은 이번 삼일절 기념식에서도 일본과의 화합을 추구하고 과거사 문제를 뒤로 넘겼습니다. 역사를 소홀히 하는 대통령의 태도는 매우 실망스럽지만, 삼일절을 그저 일본을 비판하고 도덕적 우월감에 젖어드는 날로 전락시킨 일반 국민들도 똑같이 후안무치하다고 생각합니다.
(팔레스타인, 100년 분쟁의 원인, 제4장의 서론에서 발췌)
반식민주의에 열심인 우리들이 너무나도 잘 모르는 사실이 있다. 바로 우리나라만 식민 지배를 당한 것도 아니고 일본만 식민 지배를 한 것도 아니라는 사실이다. 1910년부터 1945년까지 35년 간의 일제강점기에 전 세계의 거의 모든 지역이 유럽의 식민 지배를 받고 있었고 상당수는 수백 년이 넘게 계속되고 있었다. 누구나 알고 있는 당연한 상식 아니냐고 반문하겠지만, 그렇지 않다. 절대다수의 사람들은 그저 다른 국가들도 식민 지배를 받았다고 암기만 할 뿐 이게 어떤 의미인지를 조금도 이해하고 있지 않다.
과거 식민 지배를 받은 지역은 오늘날 100개가 넘는 국가로 독립했다. 그런데 이중 사죄를 받은 나라는 몇이나 될지 생각해 본 적이 있는가? 식민 지배를 일삼던 유럽 국가들은 기껏해야 21세기에 들어 슬그머니 반성의 목소리를 내는 듯하는 행동을 취하는 데서 그치고 있다. 배상 같은 건 어림없는 소리다. 이들은 과거 식민지였던 나라들에 수많은 금전적 도움을 주고 있지만 적선인 것처럼 ‘원조’라는 이름으로 행하고 있고 그 대가로 자국 상품의 구매를 직간접적으로 강요하거나 내정에 간섭하기도 한다.
식민주의에 대한 유럽인들의 반성과 그 방식은 앞으로도 계속해서 고민하고 노력해야 할 문제로 남아 있다. 그런데 이렇게 몰지각한 식민주의자들은 우리나라로부터 조금이라도 비난을 받고 있을까? 우리는 국제사회가 다 같이 일본의 무책임한 태도를 비난하기를 바라며 협력을 구하지만, 정작 과거를 조금도 반성하지 않는 다른 식민 국가들에는 우호의 손길을 내밀며 문화를 찬양하고 그들로부터 피해 입은 다른 국가의 상처에는 냉랭하게 행동한다.
마치 우리 가족을 살해한 살인마는 비난하면서도 다른 연쇄살인범과는 허물없는 친구로 지내는 격이다. 그러니 일본에 사과를 요구하는 것도 그저 우리가 받은 피해에 대한 배상을 요구하는 것일 뿐, 진정으로 식민주의 그 자체를 비판하는 목소리를 내는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더욱 안타까운 사실은 우리만 이러는 게 아니라는 것이다.
소수의 예외를 제외하면, 식민주의에 대한 무관심은 전 세계적으로 만연하다. 그래서 일본과 같은 식민 지배의 경험이 있는 국가들의 반성을 촉구하는 분위기를 조성하지 못한 것은 물론이고 식민주의를 종식시키지도 못했다. 21세기가 시작된 지 벌써 4반세기가 되어가지만 여전히 지구상에는 식민주의로 고통받는 수많은 사람들이 있다.
그중 하나가 1967년부터 이스라엘의 지배를 받고 있는 서안지구와 가자지구의 팔레스타인인들이다. 우리나라가 이들의 고통을 외면하고 있다는 사실은 우리가 내세우는 반식민주의의 기치가 얼마나 초라한지를 보여준다. 미국-이스라엘 간의 굳건한 동맹 관계 때문에 팔레스타인에 대한 지지는 신중해야 한다고 말할 수도 있지만, 결국 정치적 손익계산 때문에 인도주의적 가치를 외면했다는 비판을 피하기는 어렵다.
2012년에 팔레스타인의 비회원 옵서버 ‘국가’ 지위를 심사하는 유엔 총회 표결에서 우리나라는 기권했지만, 식민 지배의 역사를 뉘우치지 않고 우리만큼 미국과의 동맹에 의존적인 일본은 찬성표를 던졌다. 팔레스타인에 대한 원조 규모는 비교도 안 될 정도다. 2006년부터 2021년까지 일본의 원조는 우리보다 13배나 많았다. 심지어 2021년에는 한국이 272만 달러, 일본은 9천 136만 달러로 33.6배나 차이가 난다
(팔레스타인, 100년 분쟁의 원인, 닫는 글에서 발췌)
이 책을 쓰는 동안 한국의 문화는 세계 정상의 반열에 올랐다. 영화 기생충과 방탄소년단, 손흥민 선수 등이 세계적으로 인기라는 뉴스가 나오면 문화강국을 꿈꾸셨던 ‘김구 선생님, 보고 계십니까?’라는 댓글이 달리고 수많은 공감을 받는다. 이런 모습을 볼 때마다 너무나도 부끄럽고 안타깝다. 김구 선생님이 소망하신 발전된 문화는 예술문화에 한정된 것이 아니라 인간의 모든 정신적 활동을 총칭한다. 그런데 우리는 과연 김구 선생님께서 바라시던 그런 삶을 살아가고 있는가? 당신께서 문화강국의 꿈을 밝힌 『나의 소원』을 보라.
현실의 진리는 민족마다 최선의 국가를 이루어 최선의 문화를 낳아 길러서 다른 민족과 서로 바꾸고 서로 돕는 일이다. 이것이 내가 믿고 있는 민주주의요, 이것이 인류의 현 단계에서는 가장 확실한 진리다. ... 나는 오늘날의 인류의 문화가 불완전함을 안다.
나라마다 안으로는 정치상, 경제상, 사회상으로 불평등, 불합리가 있고, 밖으로 국제적으로는 나라와 나라의, 민족과 민족의 시기, 알력, 침략, 그리고 그 침략에 대한 보복으로 작고 큰 전쟁이 끊일 사이가 없어서 많은 생명과 재물을 희생하고도, 좋은 일이 오는 것이 아니라 인심의 불안과 도덕의 타락은 갈수록 더하니, 이래 가지고는 전쟁이 끊일 날이 없어, 인류는 마침내 멸망하고 말 것이다. ...
내가 원하는 우리 민족의 사업은 결코 세계를 무력으로 정복하거나 경제력으로 지배하려는 것이 아니다. 오직 사랑의 문화, 평화의 문화로 우리 스스로 잘 살고 인류 전체가 의좋게 즐겁게 살도록 하는 일을 하자는 것이다.
대한민국은 경제 선진국이 되었고 세상을 위해 할 수 있는 일들이 많아졌지만 우리는 여전히 남들의 고통에 무심하다. 김구 선생님이 과연 이런 모습을 보고 기뻐하실까? 심지어 식민 지배를 받고 도움을 호소하는 피해자를 외면할 뿐만 아니라 도리어 가해자로 몰고 있는데도?
우리가 저승에서 당신을 뵙는다면 호통치실 것이다. 무엇이 두려워서 정의를 외면했느냐고. 이래서야 세계의 다른 민족들에게 독립을 도와달라고 호소했던 자신들이 어떻게 편히 눈감을 수 있냐고. 김구 선생님이 “다른 나라야 식민 지배를 받든 말든 알 바 아니지.”라고 말하는 모습은 상상조차 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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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는 최소한 반식민주의의 정신을 지키는 것에서부터 국민적 공감대를 이루자고 제언하겠다. 누군가에겐 외국인의 생명이나 인권, 국제평화 따위는 하등 가치 없는 것일 수 있다. 그렇지만 우리는 일본에 식민 지배에 대한 사과와 반성, 보상을 요구하고 있다. 여기에 일말의 진정성이라도 실으려면 다른 국가들과의 손익계산을 떠나 식민주의 그 자체만큼은 비판해야 하지 않겠는가?
소수의 극단주의적 유대인들이 시온주의라는 민족주의-식민주의 사상을 추종하며 이스라엘을 건국했고, 지금도 서안지구와 가자지구를 식민 지배하고 있다. 이 사실을 소리 내서 이야기하는 것만으로도 팔레스타인인들에게 도움이 되고 평화에 기여할 것이다.
식민주의에 대한 비판은 이미 공감대가 형성되어 있지 않냐고 되물을지도 모르겠다. 전혀 그렇지 않다. 우리나라가 비판하는 것은 일본이 우리에게 입힌 피해지 식민주의가 절대 아니다. 양자를 착각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일본을 제외한 어떤 식민주의 국가에도 반성을 촉구하지 않고 이 주제에 아무런 관심도 없다.
주변 사람들에게 팔레스타인이 식민 지배를 받고 있다고 설명을 해줘도 대부분이 그냥 그런가 보다 하고 무심한 반응을 보인다. 식민 지배에 대한 분노나 연민 같은 건 조금도 찾아볼 수 없다. 오히려 남의 나라 일에 간섭해서 무얼 어쩌겠냐는 냉소를 머금거나 종교적인 이유로 식민주의를 두둔하는 사람들도 있다. 거기에 더해 앞으로는 상업적인 이유로 이스라엘을 옹호하는 사람들이 늘어날 테니 전망은 어둡기만 하다.
그러니 우리 사회가 변화하려면 독자 여러분의 역할이 중요하다. 팔레스타인의 역사가 어땠는지, 갈등의 원인이 무엇이었는지, 논쟁이 되는 사안이 무엇인지 아무것도 모른 채 그저 식민 지배는 종식돼야 마땅하다고 말해서는 되려 우리 사회 내부의 갈등만 부추길뿐이다. 그렇다고 모든 사람이 이런 수준의 책을 읽을 능력을 갖추길 기대할 수도 없는 노릇이니 깨어 있는 여러분들이 목소리를 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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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같은 사람 몇 명의 노력만으로는 우리 사회를 바꿀 수 없다. 이 글을 읽으며 역사적 사실을 배우고 논증할 능력을 함양한 독자 여러분들이 함께 나서서 진실을 알려야 한다. ... 제3자인 우리가 당장 많은 일을 해내려고 욕심부리기보다는, 우선은 반식민주의에 대한 국민적 공감대 형성이라는 작은 한 걸음이라도 내디딜 수 있기를 소망하며 글을 마친다.
일본을 비판하는 우리가 이스라엘의 식민주의를 옹호하는 안타까운 현실은 8년이란 시간을 들여서 책을 썼던 가장 큰 이유였습니다. 아직까지는 변화를 끌어내지 못했고 앞으로도 큰 성과가 있을 것으로 기대하지는 않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독립 운동가들의 정신을 몸소 기렸다는 충만감은 느낍니다. 매년 삼일절을 맞이할 때마다, 전년보다 한 명이라도 더 많은 분들이 '식민주의에 반대하는 목소리'를 함께 내주시길 기다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