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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환빈 Apr 21. 2024

4분상식| 시온주의 창시자는 누구? 유대인도 틀려요.

예전에 모교 대학 후배랑 팔레스타인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습니다. 유명한 정치외교학과 교수님으로부터 관련 수업을 들었다기에 기대했는데, 시온주의의 창시자가 테오도르 헤르쯜이라고 배웠다는 걸 보고 완전 실망했습니다. 유대인도 틀리는 속설이긴 하지만 그건 역사를 안 배운 사람들한테 해당하는 얘기고, 제대로 된 책 한 권만 읽어도 아는 기본 중의 기본적인 내용을 중동 쪽 가르치는 대학 교수가 틀린다는 게 참...


아무튼 그래서 준비했습니다. 시온주의의 창시자는 누구일까요?


1. 시온주의에 대한 정의


먼저 시온주의가 무엇인지부터 알아봅시다. 시온주의는 흔히 유대 민족의 국가를 건설하는 운동으로 널리 알려졌습니다만, 사실은 굉장히 다양한 생각이 혼합되어 있는 사상입니다. 이는 유대 국가에 반대하는 유대인들이 많았기 때문에 시온주의를 구체적으로 정의하지 않고 일부러 모호하게 내버려 두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유대 국가에는 반대하지만 유대인의 팔레스타인 이주를 돕거나 유대 문화의 부흥을 목표로 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가령, 이스라엘 건국 1년 전인 1947년에 미국의 CIA의 보고서는 유대 국가에 반대하는 미국 시온주의 단체들이 있다고 말합니다.


이런 다양성에도 불구하고 일반적으로 시온주의를 유대 민족의 국가를 건설하는 운동으로 정의하는 까닭은 지도부와 다수파의 목표가 유대 민족의 국가였고, 이에 반대하는 소수 세력은 단 한 번도 주도권을 쥐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시온주의의 목표가 단순히 유대 국가가 아닌 '민족' 국가라는 점입니다. 유대 국가를 꿈꾼 세력은 역사적으로 여러 번 있었습니다. 이들은 자신이 메시아(=구세주)이거나 혹은 메시아가 나타날 것이라는 종교적 이유에서 유대인의 팔레스타인 이주를 도모했습니다. 반면, 시온주의는 19세기 말에 세속주의자들이 민족주의적 관점에서 주창한 정치적 운동입니다. 종교적 시온주의란 것도 있습니다만, 어디까지나 부차적이고 비주류였습니다.


2. 최초의 시온주의 사상가, 모세 헤스.


최초의 시온주의 사상가는 19세기 중반 독일의 유대인 모세 헤스입니다. 그는 1862년에 <로마와 예루살렘>을 써서 시온주의를 주창하는데, 사학자 기데온 쉬모니는 헤스의 사상이 시온주의의 4가지 핵심 요소를 다 갖추었다고 말합니다.


1) 유대인을 독자적인 사회적 집단으로 인식


18-19세기에, 그리고 20세기 초까지도 대다수의 유대인들은 유대 민족이란 없고 그저 유대교를 믿는 유럽 민족의 일부라고 상상했습니다. 그러나 헤스는 유대인이 고대로부터 종교를 통해 이어져 온 독자적인 민족이라고 주장합니다.


2) 유대 집단이 처한 문제 상황을 진단


유럽에서 18-19세기는 민족 국가 시대였습니다. 한 국가 안에 하나의 민족만 있다고 간주하는 시절이었는데, 유대인은 유럽 민족이 아니라 독자적인 민족이라서 이방인 취급을 받을 수밖에 없고 그래서 박해가 더 커지게 될 것이라고 헤스는 생각했습니다.


3) 해결책의 필요성


과거에는 유대인에 대한 박해가 종교적인 이유였기 때문에 기독교로 개종하면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박해의 원인이 '민족주의'에 있고 민족성은 개종처럼 자의로 바꿀 수 있는 게 아니기 때문에 영구적인 박해를 초래하게 됩니다. 따라서 박해에서 벗어날 새로운 해결책이 필요했습니다.


4) 방법론


그게 바로 역사적 고향인 팔레스타인으로 이주해 가서 유대 '민족' 국가를 세우는 것이었습니다.


유대인이 독자적인 민족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유대 문제는 반드시 생길 수밖에 없다. “유럽 민족들은 그들 사이에 있는 유대인들의 존재를 항상 이질적으로 여겨왔다. ... 계몽과 해방에도 불구하고, 민족성을 부인하고 해외에 사는 유대인들은 거주하는 지역의 다른 민족들로부터 절대로 존중받지 못할 것이다.” 그러므로 민족성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는 팔레스타인으로 이주해 “식민촌”을 건설하고 “유대 국가”를 “재건”함으로써 민족을 부흥시켜야지만 유대 문제가 해결될 수 있다. (정환빈, 팔레스타인, 100년 분쟁의 원인, 262-3)


5) 헤스의 한계


헤스는 최초의 시온주의 사상가이지만 시온주의 운동을 탄생시키지는 못했습니다. 헤스가 살고 있던 서유럽에서는 유대 '민족'에 대한 지지가 매우 약했기 때문입니다. 헤스의 사상은 금세 잊혔고, 20여 년 뒤에 동유럽에서 시작되는 시온주의 운동에 사실상 아무런 영향도 끼치지 못했습니다.


3. 시온주의 운동에 사상적 기반을 제공한 레온 핀스커


1881년에 러시아에서 포그롬이라고 불리는 유대인 박해가 발생합니다. 이를 계기로 동유럽의 여러 유대인들이 유럽 민족과의 동화를 포기하고 유대인만의 민족을 만들 것을 주장했고, 그 방편으로 선조들의 고향인 팔레스타인으로의 이주를 장려합니다. 이에 대한 사상적 기반을 제공한 것이 바로 러시아의 유대인 레온 핀스커입니다.


포그롬이 일어나자 핀스커는 1882년에 <자력해방>을 저술해 '유대 민족의 국가'를 만들자고 설득합니다. 핀스커의 요지는 헤스와 일맥상통합니다. 그런데 나 홀로 시온주의를 옹호한 헤스와는 달리 핀스커의 글이 세상에 나왔을 때는 이미 시온주의자들이 적게나마 존재하고 있었고, 이들은 핀스커에게 달려와 시온주의 운동의 지도자가 되어 달라고 간청합니다. 그래서 핀스커는 '실천적인 의미'에서 시온주의 사상의 창시자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핀스커에 따르면, 유대인들은 “어떤 다른 민족에도 동화되거나 흡수될 수 없는 특징”을 가지고 있으며 “고향 땅에서 토착민이 아닐뿐더러 외국인”으로도 여겨지지 않기 때문에 박해를 받는다. 외국인이 체류지에서 법적, 사회적 권리를 보장받는 이유는 그들의 국가에 체류 중인 다른 나라 사람들의 권리를 보호해 주기 때문인데 국가가 없는 유대인들은 그러한 호혜적 관계를 형성할 수 없다. 그러므로 오직 유대 국가를 건설해야지만 외국인 신분을 획득하고 권리를 보호받을 수 있게 된다. 유대 국가에서 살기 원치 않는 서유럽 유대인들이 굳이 이주해 올 필요는 없다. (정환빈, 팔레스타인, 100년 분쟁의 원인, 276)


여담이지만, 헤스의 <로마와 예루살렘>은 편지 형식의 문학이고 200여 페이지에 달하는 반면, 핀스커의 <자력해방>은 군더더기 없이 잘 정리된 20여 페이지의 소책자입니다. 내용도 정치사상서의 표본이라고 손꼽아도 될 만큼 우수하다고 저는 평가합니다. 이런 차이는 핀스커가 시온주의 운동을 이끄는 지도자로 발탁되는 데 크게 도움이 되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핀스커는 시온주의 운동에 뛰어든 지 불과 8년 만인 1890년에 사망합니다. 그의 시기에 시온주의 운동은 민족의 정치적 운동으로 발전하지 못하고 팔레스타인에서 식민촌만 만드는 '식민화 운동'에 그쳤습니다. 러시아가 유대 민족주의를 탄압했기 때문에 유대인은 독자적인 민족이라는 소리를 공개적으로 말할 수 없었던 게 주요 이유였습니다.


4. 시온주의를 대중의 정치적 운동으로 발전시킨 테오도르 헤르쯜


<유대 국가>를 저술해 세상에 이름을 알린 헤르쯜은 세 번째 시온주의 사상가입니다. 그 역시도 민족적 관점에서 유대 문제를 진단하는 등 요지는 같습니다. 게다가 앞선 두 사람이 노년에 시온주의 서적을 적은 반면, 헤르쯜은 30대의 어린 나이에 저술했기 때문에 글이 투박고 절반 이상이 방법론에 대한 내용입니다. 라서 사상서로서의 가치는 떨어집니다.


그런데 이러한 사실이 『유대 국가』의 가치를 훼손하는 것은 아니다. 헤르쯜은 실용적인 계획서를 집필한 것이기 때문이다. 헤스와 핀스커의 시기에는 민족과 국가를 만들어야 할 필요성을 납득시키는 것이 중요했던 반면, 헤르쯜의 시기에는 이미 그런 사상을 가진 사람들이 여럿 존재했고 이를 ‘어떻게’ 실현할지를 고민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유대 국가』는 시의적절하게 답을 내놓은 것이었다. (정환빈, 팔레스타인, 100년 분쟁의 원인, 300-301)


헤르쯜은 두 가지 점에서 핀스커와 달랐습니다. 첫째로, 오스트리아-헝가리 출신의 서유럽 유대인이라서 러시아의 탄압을 걱정하지 않고 공개적으로 유대 '민족'을 옹호했습니다. 둘째로, 핀스커가 식민화를 통한 점진적 침투를 계획한 반면, 그는 토착민이 식민화에 반대하기 때문에 이러한 저항을 피하기 위해 열강으로부터 정치적 주권을 인정받아 단숨에 유대 국가를 건국할 것을 주장했습니다. 식민화는 반드시 그 이후에 작돼야 하고, 토착민의 토지와 국경 밖의 토지를 교환해서 토착민을 쫓아내 방안을 계획했습니다. 따라서 헤르쯜은 '외교적 협상'에만 공을 들입니다.


그런데 '외교'는 국가와 국가 간의 대화입니다. 헤르쯜 시기에 유대 국가는 없었고 유대 민족이란 것조차 없다는 게 절대다수의 생각이니 협상 자격을 인정받기가 어려웠습니다. 이 때문에 헤르쯜은 시온주의를 지지하는 유대인의 목소리를 이끌어내려고 시온주의 대회를 열고 시온주의자 기구를 창설합니다. 1897년에 처음 열린 1차 시온주의자 대회는 200여 명밖에 참석하지 않았고 이들이 대표하는 기구의 회원을 모두 합쳐도 수천 명에 불과했습니다. 그렇지만 그 수는 매년 빠르게 늘어났습니다.


헤르쯜은 10여 년만에 단명하고 그의 생전에 시온주의를 지지한 국가는 러시아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1차대전 중인 1917년에 영국이 시온주의를 지지하는 밸포어 선언을 발표하자 시온주의가 급성장하고 유대 국가로 이어지게 됨으로써 그의 방법론이 올발랐다는 평가를 받게 됩니다. 헤르쯜이 시온주의 사상의 창시자였다는 속설은 이런 공적 때문에 후대에 뒤늦게 붙은 잘못된 칭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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