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레스타인 현대사를 공부하면 어김없이 나오는 단어가 있습니다. 바로 시온주의자/시오니스트입니다. 오늘은 '시온'이라는 용어의 유래와 관련된 역사를 살펴본 후, 시오니스트보다는 시온주의자를 쓰는 게 좋은 이유를 말씀드리겠습니다.
1881-2년부터 유대인 민족주의자들은 팔레스타인으로 이주해 가서 식민촌(colony)을 세우고 유대 민족 국가를 건설하자고 주창합니다. 이들이 세운 여러 이주 단체들은 집합적으로 '시온의 연인들'이라는 이름으로 불렸고, 1884년에는 총괄단체인 '시온의 사랑'을 만들게 됩니다. 이후 1890년부터는 유대 민족주의 운동이 “시온주의"라는 이름으로 널리 알려지게 됩니다.
시온은 예루살렘 도시 동쪽에 있는 언덕(시온산)의 지명이지만, 성경에서는 고대 예루살렘을 상징적으로 지칭합니다. 민족주의자들이 후자의 의도로 사용한 것은 틀림없습니다. 그런데 왜 하필 '시온'이라는 용어를 선택했을까요?
시온 대신에 약속의 땅이나 팔레스타인, 혹은 이스라엘 땅을 내세울 수도 있었을 겁니다. 시온은 이들보다 어떤 장점이 있었길래 선택받은 것일까요? 이는 공식적으로 설명된 적이 없고 추측을 내놓은 학자를 본 적도 없지만, 나름 짐작 가는 점은 있습니다.
약속의 땅?
기독교도에게는 팔레스타인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게 약속의 땅일 겁니다. 그러나 유대 민족주의자들은 거의 전부가 세속주의자였습니다. 유대교를 믿지 않으니 자연히 신의 약속에는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들이 팔레스타인에 매력을 느낀 이유는 선조들이 이곳에서 살면서 강대한 국가를 건설했다는 성경의 '역사적 기술' 때문이었습니다.
팔레스타인?
팔레스타인은 가자 주변의 연안에 살던 블레셋 주민들의 이름에서 유래된 지명으로, 유대인들이 쓰던 용어가 아닙니다. 지금도 유대인들은 팔레스타인이란 지명을 기피하고 대신 '이스라엘 땅(Eretz Israel)'이라고 부릅니다.
이스라엘 땅(Eretz Israel)?
'이스라엘 땅'은 이스라엘 국토와는 다른 개념으로, 다양한 해석이 있지만 일반적으로는 성경 시대에 고대 유대인들이 살았던 땅을 일컫습니다. 이스라엘 땅은 시온 못지않게 유대 문학에서 빈번하게 인용되었기 때문에 '이스라엘 땅에 대한 사랑'과 '이스라엘주의'라는 용어를 쓸 수도 있었을 법합니다. 특히, 시온은 영토적 경계가 예루살렘에 그친다는 점을 고려하면, 이스라엘주의가 정치적 운동의 명칭으로서는 일반적으로 더 적합해 보입니다.
그런데도 시온이 선택된 것은 민족주의자들에게 구체적인 '영토적 목표'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초기 시온주의자들은 막연하게 예루살렘(=시온)을 포함하는 팔레스타인과 시리아의 식민화를 목표로 활동했고, 영토는 넓을수록 좋다는 주의였습니다.예를 들어, 다음 주에 살펴볼 '국가의 선지자' 테오도르 헤르쯜은 시리아의 유프라테스강까지를 국경선으로 제시했습니다. 이는 기껏해야 팔레스타인 땅과 그 인근으로 한정되는이스라엘 땅보다 적어도 배 이상 넓습니다.
따라서, 시온은 유대 국가가 반드시 지배해야 할 영토의 핵심을 제시하면서도, 국경선을 제한하지 않는다는 이점이 있었습니다. 세월이 흐르며 민족주의자들은 시온이라는 용어의 영토적 범위를 점차 확장시켰고 이스라엘 땅 혹은 팔레스타인과 유사하게 사용합니다.
민족주의 운동의 목표
오늘날에는 거의 잊혔지만, 유대 민족주의 운동은 유대 국가의 건설이나 유대 문화의 발전이 유일한 목표가 아니었습니다. 과거 유럽의 유대인들은 게토에 살며 상업에만 종사했고, 육체적 노동을 멀리 했습니다. 초기 민족주의자들은 이런 삶이 유대인을 퇴화시켰다고 믿었고, 다른 민족들처럼 '농사를 지으며' 신체를 건강하게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이는, 적어도 1880년대에는 유대 국가보다도 중요한 목표였습니다.
시온은 이런 지향성을 담아내기에 적절했습니다. 이스라엘 땅은 단순히 지명에 그치지만, 시온은 유대인들이 농사를 짓고 강성한 왕국을 건설했던 영광스런 시절을 연상케했기 때문입니다. 시온이 선택된 가장 중요한 이유가 아닐까 싶습니다.
안타깝게도, 대부분의 유대인은 육체적 노동을 기피했습니다. 처음에는 의욕을 갖고 농사에 도전했으나 일이 고되고 수확은 보잘것없는 걸 보고 금세 포기하고 예전처럼 상업에 종사했습니다. 유대인 농업 식민촌의 농장주들은 스스로 농사를 짓기보다는 아랍인 노동자를 부리며 군림했습니다. 식민촌에는 유대인 노동자도 있었으나, 이들은 통상임금으로 만족하지 않고 보조금을 요구했습니다. 그런데도 1930년에 팔레스타인에서 농업에 종사하는 유대인은 유대 인구의 10%인 1만 8천 명에 그쳤습니다.
초기 민족주의자들은 유대인의 정신과 육체적 개조를 위해 '농업 식민촌'을 짓자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농업 개혁이 실패한 게 명확해지자 후대의 민족주의자들은 유대 국가의 영토를 넓히기 위해서 농업 식민촌을 짓자고 당위성을 바꿉니다.
시오니스트 vs 시온주의자
자, 그럼 이제 오늘의 진짜 본론으로 들어갈까요? 시온주의는 영어로 Zionism으로 표기하고 추종자를 Zionist라고 부릅니다. 국내 서적과 신문에서는 시오니즘/시오니스트로 번역한 사례를 많이 볼 수 있습니다. 저는 두 가지 이유에서 시온주의/시온주의자로 표기할 것을 주장합니다.
첫째로, 우리가 Liberalism을 자유주의로 번역하고 Socialism을 사회주의로 번역하듯이, Zionism도 시온이라는 뜻을 살려서 번역해야 합니다. 시온주의는 '시온'을 연상할 수 있지만, 시오니즘은 무슨 의미인지 조금도 유추할 수가 없습니다.
둘째로, 시오니즘/시오니스트는 로마자 번역 표기일 뿐, 영어식 발음이 아닙니다. 영어로는 자이오니즘/자이오니스트라고 말합니다. 아마 이거 아셨던 분은 거의 없으셨을 텐데요. 저 역시도 시오니스트가 영어 발음인 줄 알고 착각했던 시절이 있습니다. 로마자 번역표기가 그 자체로 나쁜 것은 아니지만, 영어식 발음과 크게 다를 때는 오해를 빚을 수 있으므로 '특별한 이유가 없다면' 지양하는 게 좋지 않을까요?
시온주의의 핵심은 '시온'에 있는 만큼, 이를 드러내는 시온주의가 한국어 표기로 정착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