혹시 게니자 문서라고 들어보셨나요? 이걸 아시는 분은 아마도 역사에 조예가 대단히 깊은 분이실 겁니다. 그만큼 우리나라에 잘 알려지지 않았고, 국제적으로도 학계의 주목만 받고 있는 생소한 용어입니다.그럼에도 불구하고 '3분상식'으로 게니자 문서를 다루는 까닭은, 우리 사회에 잘못 알려진 상식을 깨트리기 위해서입니다.
유대교에서는 신의 이름(YHWH, 야훼)을 적은 문서를 함부로 폐기해서는 안 된다는 규칙이 있습니다. 이 때문에 성경이나 기도서와 같은 종교 문서는 물론이고 일상생활에 주고받은 편지조차도 신을 거론했다면 특별한 창고에 보관하는 게 원칙이었습니다. 이 창고를 가리켜 게니자라고 불렀습니다.
카이로 인근 푸스타트에 있는 벤 에즈라(Ben Ezra) 시나고그는 9세기부터 19세기까지 상당량의 문서를 게니자에 잘 보관하였습니다. 인근 묘지 등에서 발견된 문서를 모두 합쳐서 그 수는 약 40만 부에 달하는 것으로 알려졌고, 대부분은 10세기부터 12세기에 작성된 고문서입니다. 이를 일컫어 '게니자 문서' 또는 '카이로 게니자 (문서)'라고 부릅니다.
우리가 보기에는 이게 뭐가 중요한가 싶지만, 학자들은 중세 유대인의 삶을 알 수 있는 중요한 역사적 사료로서 높이 평가하였습니다. 많은 유대인 학자들이 이를 연구하여 무슬림 왕조하에서 유대인들이 어떻게 살았는지를 분석하였고 큰 성과를 거두었습니다.
게니자 문서 연구 이전에 서구 학자들은 명확한 증거 없이 막연하게 유대인들이 유럽에서보다 무슬림 왕조에서 권리를 잘 인정받고 자유롭게 살았을 것으로 추정하였습니다. 게니자 문서를 연구한 유대인 학자들은 이를 사실로서 증명했을 뿐만 아니라 무슬림들이 과거에 상상했던 것보다도 더욱 관용적이었다는 사실을 밝혀냈습니다.
카이로 게니자를 연구한 학자들은 ... 유대인의 권리가 대체로 잘 보장되었다고 본다. 납세증명서만 있으면 어느 지역이든, 심지어 국경 너머로도 자유롭게 오갈 수 있었다. 직업의 선택도 자유로워서 유대인들은 농부나 상인, 염색업자, 무두장이, 대장장이, 세공사, 의사, 관리 등 다양한 직업을 가졌다. 정부의 승인하에 유대 공동체만의 대표를 선출할 수 있었고 혼사나 유산, 구성원 간의 불화 등 공동체 내부의 문제를 해결하는 유대 법정이 공인되어 상당한 수준의 자치권을 누렸다. 또한, 유대 공동체의 의견은 관리의 임명이나 해임에도 영향을 끼칠 정도로 존중받았다. 유대 학교들은 정부로부터 보조금도 지원받았다. (정환빈, 팔레스타인, 100년 분쟁의 원인, 149)
학자들의 연구 결과를 직접 인용하자면,
쉘로모 고이테인 / "아랍 무슬림 사회에서 유대인의 처지는 중세 유럽에서 보장된 것보다 상대적으로 나았다."
모세 길 / "기독교 지역에서 팽배한 ‘예수 살해자'에 대한 극도의 증오심과 비교해 볼 때 이라크 유대인과 페르시아 유대인들이 살았던 바그다드와 그 밖의 많은 지역의 분위기는 (유럽보다) 훨씬 나았다."
마크 코헨 / "전체적으로 볼 때 유대인들은 기독교권에서보다 이슬람권에서 훨씬 나았으며, 이러한 상대적으로 보다 관용적인 분위기는 아랍의 주류 문화에 유대인들이 완전히 빠져들 수 있도록 이바지했고 때때로 정말로 ‘황금기’라는 묘사를 받을 만했다."
이들은 게니자 문서의 권위적인 학자들이고, 특히 쉘로모 고이테인은 최고 권위자로 인정받습니다. 이들 이외에도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무슬림 왕조가 대체로 유럽보다는 유대인에게 관용적이었다는 입장은 게니자 문서를 연구한 학자들의 공통된 견해입니다.
이러한 연구는 오늘날 우리가 생각하는 무슬림에 대한 통념과는 크게 다릅니다. 우리나라에서는 모든 무슬림이 테러리스트로 인식되는 수준이지요. 이런 잘못된 관념은 두 가지 요인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입니다.
하나는 무슬림들이 기독교 국가들의 식민 지배와 뒤따른 내정 간섭에 저항해 자주독립운동=테러를 저지르면서 서구권에서 생겨난 부정적인 인식이 우리 사회에 그대로 주입되었기 때문입니다. 특히, 9.11테러와 IS/다에시의 활동이 많은 악영향을 끼쳤습니다. (참고로, IS/다에시는 무슬림들 사이에서도 인정받지 못하는 테러 단체입니다. 반면, 하마스는 독립운동단체로 널리 인정받습니다.)
무슬림에 대한 잘못된 관념이 생겨난 또 다른 중요 요인은 학자들의 연구가 정치적, 종교적인 이유로 대중에 널리 알려지지 않고 있기 때문인 듯합니다. 19세기까지 기독교는 유대인 박해를 자랑스러워하거나 적어도 부끄럽게 여기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20세기 중반 나치의 홀로코스트 이후로는 입장을 급선회합니다. 이때부터 유대인 박해를 무슬림과 연관 지으려는 새로운 풍조가 생겨났고, 그러한 목적에 부합하는 "교양" 서적들이 급격히 불어났습니다. 심지어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분쟁은 이를 증명하는 핵심적인 증거로서 제시되고 있습니다.
팔레스타인의 역사를 연구하다 보면 세간에 알려진 것과 정반대 되는 사실들이 너무나도 많아서 답답하고 안타깝습니다. 무지해서인지 아니면 집단적 이익에 눈이 멀었기 때문인지 긴가민가하지만, 어떤 이유에서건 간에 역사적 근거라고는 하나도 없고 학자들의 연구와는 전혀 다른 세간의 소문이나 괴담을 사실인 양 적은 책들이 오늘날에도 계속해서 재생산되고 있습니다. 이를 읽고는 세상 진리를 마치 다 깨우친 것처럼 선악의 심판자이자 징벌자로서 활동하는 네티즌들도 많고요.
진실은 실제로 일어난 일이라서 진실인 것이지, 다수가 옹호한다고 해서 진실이 되는 게 아닙니다. 우리 사회가 이를 혼동하지 않고 무엇이 진실인지를 판별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길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