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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환빈 May 12. 2024

4분상식| 유대교 제1성지는 통곡의 벽? 서쪽벽?

유대교에서 예루살렘을 성지로 기린다는 것은 다들 잘 아실 겁니다. 그런데 예루살렘 안에서 유대인들이 가장 성스럽게 생각하는 장소는 어디일까요? 고대 유대 성전(=성스러운 신전)이 세워졌던 성전산이 유대교 제1의 성지라는 의견도 있지만, 이곳은 현재 이슬람 성지 알아크사 모스크가 세워진 곳이라 유대인들이 출입하지 못한 지 오래되었습니다. 성전산 대신 지난 수백 년 유대인들이 기도를 드리던 곳은 성전산의 서쪽 외또는 통곡의 벽이라 알려진 장소입니다.



서쪽벽을 처음 들어보신 분도 있을 거고 서쪽벽이 통곡의 벽과 같은 장소를 의미하는 것이라고 알고 계신 분도 있을 겁니다. 그러나 엄밀히 말해서 양자는 다른 개념이고 서쪽벽이 더 정확한 표현입니다. 유대인들의 언어인 히브리어로도 서쪽벽(haKotel haMa'aravi) 또는 줄여서 벽이라고 부르고요. 부 친이스라엘계는 반드시 양자를 구분하고 서쪽벽이란 용어를 사용할 것을 주장합니다. 왜 그런지 역사부터 시작해서 자세히 살펴볼까요?


1. 서쪽벽은 언제부터 기도공간이 되었을까?


성경 시대에 유대인들은 예루살렘 성전산에 세워진 신전을 가장 성스럽게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기원후 70년에 로마가 성전을 파괴하고 135년에 유대인을 예루살렘에서 영구적으로 추방하면서 성전산은 폐허가 됩니다. 이때 유일하게 잔해가 남은 게 있었는데, 그게 바로 오늘날의 서쪽벽입니다.


서쪽벽은 세간에 유대 신전의 서쪽벽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러나 이는 신성성을 부여하기 위해 후대에 창작된 것으로, 실제로는 성전산 비탈에 지어진 옹벽(=담장)에 불과했습니다. 그것도 만들어진 지 그리 오래되지 않은, 기원전 1세기 헤롯왕의 작품이었습니다. 신전의 일부가 아니었기 때문에 당연히 고대 유대인들은 이를 성스럽게 여기지 않았고, 중세 시기에도 역사적 유산으로서만 주목받았습니다.


예루살렘에서 추방당한 이후로 유대인들은 예루살렘 동쪽에 있는 감람산에서 예루살렘을 내려다보며 기도를 드렸습니다. 탈무드에서는 신의 임재(Shekinah)가 성전산에서 감람산으로 이전했다고 가르칩니다.


유대인의 예루살렘 추방 정책은 로마가 4세기에 기독교를 받아들인 이후에도 계속되었습니다. 그러다 마침내 7세기에 무슬림들이 예루살렘을 정복하고 유대인의 거주를 허락합니다. 많은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으로 돌아왔으나 성전산에서 기도를 드리지는 않았습니다. 무슬림들이 폐허가 성전산에 알아크사 모스크를 짓고 이교도의 출입을 금지했기 때문입니다. 자연히 유대인들은 계속해서 감람산을 제1성지로 삼았습니다.


1천여 년의 세월이 흐른 뒤, 오토만 제국은 유대인들에게 서쪽벽 앞에서 기도를 드리는 것을 허용하는 칙령을 내립니다. 이 칙령은 현존하지 않지만 16세기 중반에 발표된 것으로 추정됩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1백여 년이 더 지난 1625년에 처음으로 서쪽벽 앞에서 합동기도회를 가집니다. 이후 서쪽벽에서 기도를 드리는 유대인들이 서서히 늘어났고, 19세기 중반에 이르면 보편적인 관습이 됩니다.


이 같은 역사적 사실은 유대인들도 잘 모릅니다. 유대교에서 이를 쉬쉬해서 그런 측면도 있습니다. 서쪽벽이 신전 벽이 아니라 옹벽에 불과했고, 중세가 끝날 무렵까지도 유대인들의 관심을 못 받고, 서쪽벽에서 기도 공간을 마련해 준 게 무슬림들이었다는 사실은 유대교의 권위를 떨어트리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625년에 최초로 합동기도를 드리고 19세기 중반부터 기도공간으로 널리 사용되었다는 역사적 사실 유대교가 1930년경에 국제연맹(유엔의 전신)직접 제출한 기록입니다. 당시 유대교는 이 기록을 넘기지 않으려고 버티다가 어쩔 수 없이 내놓았습니다.


2. 통곡의 벽과 서쪽벽 구분


그럼 통곡의 벽은 뭘까요? 통곡의 벽은 유대인들이 기도드리며 흐느끼는 모습을 보고 아랍인들이 붙인 별칭입니다. 유럽 작가들이 이 별칭을 즐겨 사용하면서 기독교도들 사이에서는 통곡의 벽이 보편적인 용어로 자리 잡게 됩니다. 유대인들도 이 표현을 즐겨 사용했습니다. 그러나 최근에는 '일부' 유대인들이 이를 모멸적으로 받아들이고 있고, 또한 정치적 이유에서 서쪽벽이란 용어의 사용을 옹호합니다.


서쪽벽은 전체 길이가 485-488m에 이릅니다. 오늘날 유대인들이 기도드리는 공간은 이중 약 58m에 해당하고, 통곡의 벽은 이 부분만을 일컫습니다. 즉, 통곡의 벽(=기도 공간)은 서쪽벽의 일부에만 해당합니다. 유대교에서는 서쪽벽 전체에 대한 권리를 주장하고 있기 때문에, 오해를 살 수 있는 통곡의 벽이란 용어를 지양합니다.


통곡의 벽의 길이는 역사적으로 변화해 왔습니다. 오토만 제국은 단순히 서쪽벽 앞에서 기도드리는 것을 허용했고 구체적인 장소를 지정하지는 않았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그래서 기도하는 유대인의 수가 늘어나면서 통곡의 벽도 점차 확장된 듯합니다. 1929년에 영국 정부기록을 보면 당시 통곡의 벽은 30m였습니다. 이후 이스라엘은 1967년에 예루살렘을 군사점령한 후 이를 배로 넓혔습니다.


3. 무슬림과의 갈등


서쪽벽은 유대교 유물로 인식되지만, 그건 우리가 기독교 중심의 서구권에 편입된 사회라서 그런 거고 실제로는 무슬림 건물의 일부입니다. 무슬림들은 아무도 찾지 않아 폐허가 되어 있던 성전산에서 알아크사 모스크를 지었고, 당시 유일하게 잔해가 남아 있던 서쪽벽을 1천 넘게 보수하고 증축해서 사용하고 있습니다. 영국강점기(1918-1948) 때 서쪽벽 전체에 대한 "법적으로 정당한 소유주"는 무슬림들이었고 영국 정부와 국제연맹은 이를 명시적으로 확인하였습니다.


이 때문에 16-19세기 동안 유대인들은 서쪽벽 앞에서 기도를 허용해 준 무슬림 정부의 관용에 감사했습니다. 그러나 20세기에 유럽에서 온 유대인들은 서쪽벽을 온전히 자신들의 소유물로 주장했고, 나아가 일부는 알아크사 모스크를 허물고 유대 신전을 짓자고 주장했습니다. 이스라엘은 1967년에 통곡의 벽 앞에 있던 아랍 주거지를 불도저로 밀어버리고 135 가구(약 650 – 1,000명)를 추방해서 오늘날의 '통곡의 벽 광장"을 만들어냈습니다.


하단의 좌측 사진은 1910년에 통곡의 벽을 촬영한 건데, 보시다시피 원래는 통로가 매우 좁았습니다.(Matson Eric이 촬영, 이스라엘 공보실 제공). 이스라엘이 주거지를 파괴해서 우측 사진처럼 확장한 것이지요.



오토만 시기의 역사가 증명하듯 서쪽벽은 갈등을 일으킬 이유가 없습니다. 무슬림들은 서쪽벽 안에 있는 모스크에서 기도를 드리고, 유대인들은 밖에서 기도를 드리면 되니까요. 그러나 성전산에 유대 신전을 짓고 알아크사 모스크를 파괴하려는 유대인 극단주의 세력이 엄연히 존재하고 이스라엘이 이를 정치적으로 활용하면서 종교적 갈등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서쪽벽에 대한 유래와 진실, 그리고 갈등의 이유까지 모두 새로운 내용들이죠? 이처럼 그동안 팔레스타인에 대해 우리 사회에 알려진 정보는 말 그대로 역사 왜곡 수준의 속설 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전 세계의 수많은 나라들, 특히 식민 지배를 경험한 모든 국가들이 팔레스타인을 지지하는데도 우리나라만 유독 이스라엘을 지지하고 있는 거고요. 우리가 역사를 배워야 하는 이유는 바로 이런 데 있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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