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사람독서

'사람책'이 내게 말해준 것들

사람 독서

by 겨자씨앗

책을 오랫동안 혼자 읽어왔다. 나는 학창 시절에 문예부장이었고 학급 문집을 만들었었다. 학업이란 중압감에 눌렸던 시절, 한 달여간 문예부 친구들과 글을 베껴 쓰고 꾸미고 목차를 짠 후 마지막 내 이름 석자를 보는 희열에 몇 날 며칠 감동에 겨웠었다. 그러고보니 그때 보았던 글은 기억에 없고, 사람만 남았다.


사회 초년병 시절, 스쳐 지나가는 기억 속에 잠시나마 함께 읽었던 책들의 기억이 있다. 책보다는 함께 했던 사람들이 그립다. 신랄하게 비판하고, 도끼를 세 대, 네대 얻어 맞고 집으로 터덜터덜 걸어오면, 유난히 빚 나는 별이 나를 감싸 안으며 토닥거려 주었다. 오늘도 한 뼘 자란 거라고.

'책 없는 독서모임'을 이끄는 이정훈 대표님이 있다. 그가 쓴 [10권을 읽고 1,000권의 효과를 얻는 책 읽기 기술]에서 나온 이야기다.


책을 누구나 접할 수 있는 시대는 인류 역사 중 얼마 되지 않는다. 그렇다면 책을 접하지 못했던 시절의 인간은 미성숙했을까? 우리는 책만으로 통찰력을 얻는 것이 아니다. '책없는 모임'은 '사람이 곧 책이다'라는 신념으로 서로의 가치관과 생각을 나누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아무리 많은 책을 읽어내도 사유와 질문을 거치지 않는 독서는 그저 장식일 뿐이라고 말한다.


저자의 생각에 일부분 동의한다. 내가 사람책에 매력을 느꼈던 것은 혼자만의 사유는 편협과 울타리 밖으로 나가길 거부했기 때문이다. 저자와 대화하는 방법을 몰랐던 나는 독서토론 현장에서 사람들의 말에 귀 기울이며 속으로 감탄과 감복을 하게 된 경우가 많았다. 같은 장면을 다르게 보는 능력, 숨겨진 의도를 알아차리는 심리관찰력, 연결 고리를 이어 맞춰 첫과 끝을 꿰매어 가는 혜안, 유창한 말솜씨와 탁월한 해석을 해내는 분들을 보며 주눅이 들려다가도 세상 재밌는 썰전이 이곳에 있구나 싶었다.


사람이 책이라면 책이 그들의 마음이기도 했다.


나는 학교 밖 청소년들 독서모임을 이끄는 중이다. 부모와 자녀가 함께 선택한 길을 걷는 가정들이라 제법 올곧고 순종적이며 독서력도 꽤 있는 중고등학생들이다. 그래도 처음에 서먹하기는 마찬가지였다. 훗날에 들은 거지만 내 수업은 조금도 기대하는 마음이 없었단다. 하라니까 어쩔 수 없이 참석한 것이었다.


늘 예정된 시간인 1시간 30분을 훌쩍 넘겨 3시간 가까이 토론을 했다. 우리는 책으로 서로를 탐색했다. 책이 있었기에 그들을 좀 더 잘 이해하게 됐다.


한동일 작가의 [라틴어 수업]을 함께하면서 공부와 성공, 습관과 학업, 고민과 진로 등을 나눌 수 있었다.

"너희들이 가진 위대한 유치함은 뭐니?"

어떤 친구는 가족들이 자신의 일기장을 보는 것이 싫어서 헬라어를 배우기 시작했고, 또 한 명은 세계 역사책을 읽다가 메소포타미아어가 신기해서 자기 이름과 여러 문장을 써보았다고 했다. 중학생인데 화이트 해커가 되고 싶어서 C언어와 자바책과 씨름 중이라 했고, 연설을 잘하고 싶어서 유명 연설문을 찾아본다는 학생, 본인이 작곡한 곡을 그 자리에서 들려주기도 했다. 왜 시큰거렸는지 모르겠다. 이들도 책상 앞에서 고뇌하며 성찰하는 한 인간의 군상이구나. 고치 속에서 날개를 펼칠 순간이 오길 기다리는구나. 나는 그 순간 청소년이 아닌 장성한 객체로 그들을 대하게 됐다.


"너희들은 어떤 어른이 되고 싶니?"

"아낌없이 나누어주는 사람이요.

"긍정적이고 도전적이고 의미 있는 일을 성취하는 사람이요."

"순수하고 따뜻하고 맑은 영혼을 가진 사람이요."

"마지막이 아름다운 사람이요."

"한결같이 청춘의 마음을 가진 사람이요."

그래 그래. 너희들이 바라는 그런 어른의 모습이길 나도 바라. 나의 낯설었던 시각을 책이 아니었다면 무엇으로 채울 수 있었을까.


관계는 누군가에게 고마운 존재가 되어주는 것이다. 사람책모임은 결코 만날 수 없었던 사람들을 이어주었고, 단 한 번의 만남조차 인상 깊은 각인을 남겼다. 인연으로 이어지지 않았어도 그 사람과 함께했던 책을 보면 그 순간이 떠오른다. 흔적과 자취를 남긴다. 더군다나 인생 띵작과 함께한 사이라면 말해 무엇하랴. 그리하여 어느 때부터인가 나는 참여자에서 인도자의 자리로 나아가는 어느 지점에 서 있게 됐다. 앞으로 만날 사람책들을 위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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